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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며칠에 걸쳐 쓴 일기를 며칠 후 읽다 보면 종국에는 멀미가 난다, 2월마다 2월이 싫었다. 그런지 오래 되었다. 꼬리가 잘린 것 같은 달력 모양도 어색했고 4년마다 하루가 더 생기는 것도 이상했다. 어릴 때는 겨울방학과 봄방학 사이 그 어중간한 몇 주를 이해할 수 없었고 머리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많은 2월에 싸우거나, 헤어지거나, 버려지거나, 했다. 2월마다 좋은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쁜 일이 많았다. 매해 더욱 새롭게 2월을 싫어했다. 일 년 중 제일 짧은 달에 나는 제일 길게 괴로웠다. 이번에도 어림없었다. 불안이 농축된 2월이었다. 그건 원서 결과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작년 2월과는 또 다른 불안이었는데, 얽혀있는 사정이 많기도 했거니와 어떻게 정확히 형언할 수도 없는 질감이어서 나는 종종 입을 다물며 외로워했다. 대학원 마지막 로테이션을 끝낸 2월 마지막.. 더보기
and the commercial caption read "fantasy, do not attempt," 아프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아침 침대에 누워 고민을 하다가 병가를 내면서도 내가 정말 아픈 건지 아프다고 착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 무엇이든 느끼기 이전에 생각하면 망하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이런다. 아무튼 전자로 결론 짓고 나니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주말에 걸쳐 내내 앓았다. 약기운에 어마어마하게 잤다. 약국에 가서 친구가 추천한 약을 샀다. 남자친구는 밥을 잘 챙겨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잘 먹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끼니 거르니 말고, 죽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스프 같은 거라도. 마치 내가 굶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잘 먹었다. 감자 스프를 데워 먹고 계란이 들어간 만두국을 해먹었다. 꾸역꾸역 먹었다. 코와 목이 부어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불을.. 더보기
"there shouldn't be this ring of silence, but what are the options," 10월에 여기로 이사하고 나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러 바닷가에 간 적은 여러 번이지만 정작 해변으로 내려간 건 7월에 여길 방문할 때 한 번.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한 여자애는 그건 거의 범죄 수준인데 클로이, 했다. 지난 며칠은 축축하게 추웠다. 사흘 연속으로 바닷가에 놀러갈 때마다 사방에 해무가 가득했다. 마지막 날이었던 토요일에야 날이 풀렸다. 갈까? 가자. 남은 사람들끼리 망설임 하나 없이 신발을 벗어 들고 모래사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새벽이었고, 가로등은 너무 멀어 충분히 어두웠다. 안개까지 겹쳐 모든 것이 무채색이었다. 바다가 착각처럼 보였다. 서로는 보이지 않았다. 신발을 어디 한 곳에 모아두고 더듬더듬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다들 주저앉아 꾸준한 파도 소리를 들었다... 더보기
잠들기 전 문득 고맙다는 말을 듣고 나는 또 뭘 잘못한 걸까 생각한다, 동기 언니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내부가 복잡해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두어 번 와본 적이 있었어서 미로 같은 골목골목이 살짝 기억날 것도 같았지만 아닌 척 일부러 헤맸다. 더군다나 가로등이 흐려서 몹시 어두운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거기 같았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차가 약간 울컥댔다. 차에서 내리면서 믹서기에 담겨 있던 와인을 쏟았고, 이사하면서 뒷좌석에 쌓아두었던 두루마리 휴지로 바닥을 닦았다. 전조등을 끄지 않고 꾸물댔더니 근처의 개가 한참을 짖었다. 언니한테 미리 받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갔다. 부엌의 불을 켜고 보니 믹서기에는 와인에 불어터진 딸기만 잔뜩 남아있었다. 어젯밤에는 한참 짐을 싸다가 힘들어서 잠깐 드러누운 사이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떴다. 그 와중에 추워.. 더보기
제출하지 못한 기분이 쌓여갑니다 나는 얼마나 멸망할까요, 쓰던 글을 여러 번 지웠다. 가득하게 할 말이 없다. 마음이 와글대는 걸 빼곡함이라 착각했다. 껍질처럼 살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 비참하다. 화산재 같은 눈이 내리던 몇 주 전 상수에서 만난 친구는, 이 모든 행운과 기회의 맥이 끊어졌을 때 내게 남아있어줄 것들은 - 만약 있다면 - 과연 무엇일지를 염려하는 나에게 커리어 바닥을 찍고 있는 본인의 근황을 풀어놓으며 그래 그런 파도라도 꽉 잡고 있어, 라고 했다. 결국엔 다 흐름 타고 보는 거라며. 그렇나? 그렇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 비참하다. 뚫려가는 달력을 본다. 미국으로 돌아온지 겨우 열흘이다. 체감시간은 한 달이 넘는다. 시차 때문에 골목처럼 헤맨 밤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발음도 예쁜 1월,의 절반이 갔다. 그러나 애초에 계획 없이 시작한 새해.. 더보기
그렇게 우리의 사방이 호흡으로 찬란했다, 서점에서 나와 들어간 식당에서 남자친구는 삼계탕에 소주를 시켜놓고 나와 마주보고 앉았다가 문득, 너 뇌과학 공부하잖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하더니 '기억'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나조차도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단어와 개념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풀어 설명했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작용이 같은 자극 앞에서 예전보다 강해지는 걸 우리는 학습이라고 칭해, 치매는 기억하지 못하는 질병이고 PTSD는 망각하지 못하는 질병이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추위에 떨며 주위를 배회하다가 골목 여럿을 통과해 영화 에 나온 소설에 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고, 담배를 피우던 주인분은 남자친구에게 불이 나간 천장을 좀 봐달라 부탁하셨다. 깨진 전구 조각이 떨어지는 밑에 서서 전구를 갈아끼우는 남자친구를 보.. 더보기
그래서 여기에 다정을 약속한다, 연달아 있는 시험 세 개 중 맨 첫 시험이었을 목요일 시험이 다음 주 월요일로 느닷없이 미뤄졌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답장을 보내고 동기 언니와 공부 스케쥴을 상의하고 비행기 시간을 재차 확인하면서 갖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보다가 뭐 어떻게 되겠지, 마음을 내려두자마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간 적립해둔 피로가 와르르 무너져서인지, 밤에 씻고 침대에 앉아 무릎 위에 랩탑을 올려 두고 프레젠테이션 두 개를 한꺼번에 만들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구겨진 자세로 새벽에 깨서 랩탑을 바닥에 내려두고 램프를 끄고 이불을 제대로 덮고 낙하하듯 다시 잠이 들었다. 아주 푹 자고 났더니 이른 아침에 깼을 때 마음이 왠지 조금 허했다. 친구가, 무슨 일 있었어? 뒤늦게 답장을 보낸 걸 몇 시간의 텀을 두고 확인했다. 대답.. 더보기
"우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역할을 할 거야 하지만 내가 꼭 흰 돛을 보게 하자," 땡스기빙에는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다른 짐과 함께 조수석에 두고, 진하게 내려 텀블러에 담은 커피를 마시면서 남쪽으로 차를 네 시간 정도 몰아 친구 집으로 갔다. 출발할 때만 해도 은근 추워서 입고 있던 스웨터가 고마웠는데 친구 집은 내가 있는 곳보다 한참 남쪽이라 그런지, 어렵지 않게 찾은 친구 집 앞에 주차를 하고 마중 나온 친구를 껴안을 때 옷을 밀치고 들어오는 열기를 느꼈다. 친구는 운전 한 달 반 만에 장거리를 운전해온 나를 신기해했고("운전 7년차인 나도 제일 오래 운전한 게 몇 달 전에 세인트루이스랑 시카고 왕복한 건데") 플로리다 주립대를 다니는 친구 동생은 아쉬워했다("운전해서 오는 거 알았으면 카풀할 걸"). 삼 년 전에도 한 번 간 적 있는 친구 조부모님 댁에서 친.. 더보기
그래서 골목과 언덕 그리고 음표 같은 것들을 부러 생각해, 많은 부고가 그러하듯 생각하지도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부고를 갑작스레 전해 듣고는 추운 밤길에 멈춰서서 전화를 걸며 울다가 체했다가 토했다가 이내 남은 며칠을 쏜살같이 흘려 보냈고 여러 개의 늦은 시각과 밤거리를 지났고 많은 사람들을 차례대로 껴안았고, 밤을 꼬박 새며 짐가방을 싼 뒤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온 몽롱한 상태에서 또 다른 부고를 무력하게 전해 들었다. 역시나 카톡의 가지런한 활자들로 전달 받은 소식이었고 역시나 매스컴을 타는 비극이었으며 나는 그 여과없음에 뺨을 한 대 맞은 기분이었지만 시차 때문인지 온도차 때문인지 첫 부고 때와는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만 내 얼굴 어딘가에 고여 있는 듯한 불편한 울컥함을 없애려고 넋을 반쯤 놓고 늦은 저녁 익숙하지 .. 더보기
모든 설명은 이따금 구차하네요 나는 정적을 듣네요, 기본값이 실패인 일을 하고 있다. 일단 실패를 가정하고 들어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로부터 쉬지 않고 들어와서 늘 주지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진심으로 숙지하기까지는 너무, 오래 걸렸다. 내가 알고자 하는 건 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른다, 이 사실에 대한 마음가짐이 단순한 주지에서 그럴싸한 숙지로 바뀌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건 작년 말에 겨우 진실로 깨우쳤고, '디폴트 = 실패'의 공식은 이번 달에 드디어 머리에 새긴 것 같다새겼다. 이제라도 나의 일부가 되어서 가까스로 다행이다. 겨우 마음이 편하다. 따라서: 낭비에 익숙해지기로 한다. 낭비는 곧 죄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생각은 변하지 않겠지만, 못 지킬 약속을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니는 것보다는 더.. 더보기
"so can't you see we're in the middle, somewhere," 시카고에 있던 사흘 동안 원래 만나려던 친구들 외에도 몇 명을 더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우리 기숙사 RA였던 친구도 있었다. 우리보다 한 학년 위로, 재작년 건축 학사로 졸업해 지금은 시카고의 한 건축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직업이나 성격이나 영락없는 Ted Mosby다("How I Met Your Mother"). 본인은 자신이 Ted Mosby보다는 Barney에 가깝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나... 어쨌든, 학부 때에는 우리에게 사뭇 진지한 척 얘들아 술 마시면 안 되고 밤에 떠들면 안 되고 파티 열면 안 되고, 이런저런 훈계를 했던 그 친구와 함께 그 친구가 사온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하는 건 또 신기한 일이었다. 밖에서 몇시간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저녁으로 먹다 남긴 피자를 하나 집.. 더보기
it's not the matter of "could you" but "would you", 화분에 매일같이 물을 준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젤리형 비타민을 먹고 물을 마시고, 그렇게 출근 준비를 하면서 컵에 수돗물을 받아 흙에 골고루 물을 준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고 기본 화장을 하고 가방과 사원증과 텀블러, 핸드폰과 방 키를 챙겨서 출근한다. 수국은 물을 참 많이 먹는다. 빨대 같다. 하루는 흙에 물이 너무 많아 뿌리가 썩으면 어쩌나 싶어서 이틀 넘게 물 주는 걸 걸러봤더니 그새 시들해져 있었다. 깜짝 놀라서 얼른 물을 주자 수국은 몇 시간 후 거짓말처럼 쌩쌩해졌다(너도 참 살아있구나). 그 얘기를 들은 남자친구는 조금 웃더니 죽이지마, 했다. 어쨌든 내 유일한 식물은 꾸준히 크고 있다. 꽃받침이 덜 자라서 왔던 것들도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색이 없던 모서리가 푸른색과.. 더보기
"would you love me over like a bottle of gin,"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 받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안 줄래, 뻔한 건 싫어. 남자친구는 나에게 그렇게 묻고 혼자서 그렇게 대답하더니, 생일날 낮 시간에 맞춰 반의 반 정도 만개한 수국 화분을 보내왔다. 너는 네가 나에게 안겨준 마음의 크기나 모양이나 색깔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예뻐? 좋아? 마음에 들어? 신난 나에게 차근차근 물어오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너 같고, 꽃다발도 아니고 화분이라니 그것도 너무 너 같아서. 응 너무 예뻐 완전 좋아, 하면서 웃었다. 집에 살아있는 것이 들어오자 나도 더, 사는 것 같다. 새로 로테이션을 시작한 실험실은 지난 실험실보다 규모가 크고 일하는 공간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오늘 아침에는 본래 실험실이 있는 병원 본부로 가지 않고 위성 실험실이 있는 집 근처 병동.. 더보기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dynamic" and "destructive", 첫 로테이션을 - 내 기준에서는 - 무탈하게 마무리지었다.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여러가지를 배웠다. 떠나기 며칠 전에는 포닥 오빠로부터 붓을 선물 받았고("로테이션 다 끝나면 이 붓 쓰러 꼭 우리 랩으로 돌아오는 거다?") 마지막 날에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일식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운좋게 노동절을 끼고 사흘을 쉬었다. 주로, 잤다. 처음으로 주말 내내 쉰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졸려서 지치도록 잤다.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술도 마시고 한식당에도 가고 쇼핑도 하고, 벼르고 있던 운전 연습도 했다. 차 주인인 친구가 조수석에 앉아서 코치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스키드 마크를 볼 때마다 조금 무서웠다. 차가 없는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최고 70마일까지 밟았다. 내 속도를 내가 느낄 수.. 더보기
"imagine yourself away from me," 매일의 기도가 고작 멍청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지겹다. 패턴이라니. 일정하다니. 측정이 일상이 될까봐 매순간 두려워서 그랬던 거라고 여전히 변명해보지만, 미지의 파라미터를 얼마나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가 - 그 능력이 제일 관건이겠다. 원하는 그림이 있으면 거기에 가서 닿을 수 있도록 틀과 단계, 체계를 차근차근 세우는 과정. 개별적인 숫자들을 수집하고 그것들로 나의 외부를 조립하여 가설을 무장하는 일. 남들의 의구심을 객관적인 수치로 물리치고 내 작업을 단단하게 방어하는 방법. 나의 수집목록을 신뢰하되 맹신하거나 속아 넘어가지 않는 연습. 그깟 숫자 따위로 남을 속이지 않을 것은 제일 기본적인 약속.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와글와글한 숫자들을 굉장히 자주, 생각한다. 쉬지 않고 유의확률에 유의하고, .. 더보기
너는 우리만의 매일이 외딴 섬 같다고 둘레를 따라가며 웃었지만, 좌초를 자초하지 않았으면, 바란다. 그런데 내 세계는 어쨌거나 내가 자초하니까, 결국에는 좌초하지 않을 것을 허공에다 맹세한다는 건데? 무턱대고? 서사가 빈약하네요. 붕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네요. 과연 나를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 어떤 실험쥐들은 프로토콜에 따라 이산화탄소로 안락사를 시킨다. 살아 움직이던 것들이 단 몇 분 만에 죽어나온다. 그것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숨을 쉬려고 했던 건지 이빨 사이에 모래나 종이 조각 같은 것이 하나씩 끼어있다. 만져보면 아직도 따뜻하잖아, 그게 마음이 좀 그래. 뒷처리를 도와주던 포닥 오빠가 말했다. 아주 바빴던 어느 하루는 저녁도 먹고 세탁기도 돌릴 겸 실험 하나를 마치고 숙소에 들렀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뜨겁게 마른 빨래들을 침대 위에 급한 대.. 더보기
in the parking lot i misread "pay here" as "pray here", 자신의 복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는 애들의 눈빛을 본다. 불운보다는 운에 더 민감한 그런 애들은 마음에 소중함이 질서있게 들어찬다는 것이 어떤 모양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타고난 걸까. 부유富有하되 부유浮游하지 않는 그런 건 어떻게 습득될 수 없는 게 아닐지. 그 어떤 순간에도 굉장히 살아있는 것 같다. 내가 대신 즐겁다. 부디 평생 충만해라. 핸드폰에서 자꾸만 안개 경보가 울리는데 대체 어디의 안개를 이야기하는 건지. 하나도 뿌옇지 않다. 끈질기게 예고되는 두꺼움이 없다. 여기의 여름은 이미 다 끝난 것 같다. 보통 여름이 이렇게 짧냐고 묻자, 여기에서 7년 넘게 살고 있는 애가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원래 이것보다는 좀 더 따뜻해요, 그래도... 왜 좀 더 더워요, 라고 대답하지 않은 걸까. 아직.. 더보기
"tree don't care what the little bird sings," 미국에 5년 동안 있어오면서 사는 곳에 텔레비전이 생긴 건 처음이다. 그래서 몇 주 전부터 숙소에서 자거나, 공부하거나, 책을 읽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종 텔레비전을 켜두기 시작했다. 아침에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면서 곁눈질로 뉴스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는 시덥잖은 만화를 틀어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렇게 집중하며 보고 있지는 않고, 그저 소리와 움직임이 있구나, 정도 생각한다. 조금 전에는 코난 오브라이언 토크쇼가 끝났고 오피스가 시작했다. 생각에 아득해지는 순간이 버겁게 느껴지는 건 뭉게뭉게 뭉치는 생각 가운데에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딱히 없어서이지 않을까. 나는 천성이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촉각을 맹신하고, 그런 헛믿음에 발을 수 차례 헛딛으면서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게 무엇이.. 더보기
i almost typed "who are you" instead of "how are you", 조금 전 Rss feed로 폴 엘뤼아르 시의 일부를 받았는데 제목 말고는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번역기를 돌렸다: Je n’ai pas pu percerLe mur de mon miroirIl m’a fallu apprendreMot par mot la vieComme on oublie - Paul Éluard, "Je t’aime" I have not been able to break throughThe wall of my mirrorI have had to learnLife word by wordAs we forget - Paul Éluard, "I Love You" 이번 주 초에만 하더라도 하늘이 그렇게 예쁘더니 며칠 갑자기 흐리고 반짝 춥다. 오늘은 반팔에 가디건을 입고 다녔는데 반팔 대신 긴팔을.. 더보기
"'cause you'll be pretty as usual," 도시 특유의 지형 때문에 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꾸로 흘렀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가운데는 불쑥 솟아 있어서 달리는 차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 너머의 땅이 보이지 않아서 마치 하늘 속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바닷가의 모래는 입자가 곱지만 모래사장 자체는 딱딱해서 사람들은 파도 바로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했다. 나는 나를 잡아끄는 사람들의 손길을 못 이기는 척,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게 하나의 큰 욕조라면 좋겠다. 입 안의 소금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젖은 옷 위에 친구의 티셔츠를 빌려 입고 숙소로 돌아가 씻었더니 졸음이 몰려왔다. 일정이 빡빡해서 학교 본부로 돌아갈 즈음에는 입안이 몽땅 헐어 있었다. 집 앞 주차장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본다. 낮이 짧.. 더보기
"my big dreams walk behind me, they trick, they scheme, they tease," 2년 가까이 일했던 곳에서는 실험실 사정으로 동물 실험을 직접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로테이션 랩에 들어가자마자 포닥 오빠에게 부탁해서("저 그냥 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가르쳐주시면 될 거에요.") 쥐(마우스)를 올바르게 손에 쥐는 법부터 각종 수술 및 해부를 배웠다. 며칠 전 쥐를 마취시키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오빠가 이제 꽤 능숙해졌네, 하셨다. 습성을 익히니까 이제 좀 알겠지? 네, 동작과 동선이 보여요. 환하지는 않더라도 뻔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습관과 성질이라니요. 어제 오늘 처음으로 동기들을 한자리에서 만났고, 재학생들도 많이 만났다. 학교의 돈자랑(?) 또한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풍족한 게 좋다.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니까 최대한 넉넉하고 걱.. 더보기
내가 아무리 대각선으로 걸어도 측면의 너에게 그건 뻔한 평행이겠지, 금요일 오후 정도 되면 긴장이 풀리면서 집중력이 떨어지고 기분이 느슨해진다. 정신을 차리려고 숨을 참는다. 주말에는 잠을 많이 잔다. 일주일 동안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피곤하고, 아무리 많이 자도 더 잘 수 있을 것 같다. 두세 번 깨면서도 꾸준히 자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없다. 어리둥절하다. 세탁기는 흰 세탁물과 희지 않은 세탁물을 구분해서 일주일에 한 번, 두 대씩 돌리고. 손빨래도 일주일에 한 번. 숙소에서 제공하는 수건을 쓰다보니 세탁물이 생각보다 적다. 예전 아파트에서는 세탁기 한 대당 쿼터가 여섯 개 필요했는데 여긴 쿼터 세 개면 된다. 대신에, 세탁과 같은 빈도로 방 청소를 부탁하는 메이드에게 팁을 남긴다. 오늘은 메이드 서비스 팻말을 문에 걸어두고 점심 약속에 나갔다가 오.. 더보기
"in a matter of time, it would slip from my mind," 분명 비가 잦아든 틈을 타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는데, 절반쯤 왔을 때 또 비가 쏟아졌다. 몸의 절반 이상이 비에 흠뻑 젖었다. 우산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쩔 줄 몰라하며 실험실에 들어갔더니 동갑내기 랩텍은 빗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고 껄껄 웃고는 병원 근처 대학의 북스토어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급하게 산 트레이닝 바지는 남자용이라 그런지 제일 작은 사이즈였는데도 컸다. 하루 정도 입어보고 불편하면 나중에 환불하려고, 가격표도 떼지 않고 허리와 바지 밑단을 접어서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병원 분위기가 좀 보수적이다보니 자꾸 눈치가 보였다. 입학 면접 이후로 처음 뵙는 교수님은 악수를 청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잠옷을 입고 오면 어떡해요? 교수님, 이건 잠옷이 아니구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