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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tree don't care what the little bird sings,"


미국에 5년 동안 있어오면서 사는 곳에 텔레비전이 생긴 건 처음이다. 그래서 몇 주 전부터 숙소에서 자거나, 공부하거나, 책을 읽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종 텔레비전을 켜두기 시작했다. 아침에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면서 곁눈질로 뉴스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는 시덥잖은 만화를 틀어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렇게 집중하며 보고 있지는 않고, 그저 소리와 움직임이 있구나, 정도 생각한다. 조금 전에는 코난 오브라이언 토크쇼가 끝났고 오피스가 시작했다.


생각에 아득해지는 순간이 버겁게 느껴지는 건 뭉게뭉게 뭉치는 생각 가운데에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딱히 없어서이지 않을까. 나는 천성이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촉각을 맹신하고, 그런 헛믿음에 발을 수 차례 헛딛으면서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게 무엇이든 어느 정도의 형태가 있기를 내심 바라는 경향. 외곽이 있어야 대상이 분명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적어도 필사 정도는 할 수 있는 여지를 달라는 소망이잖아. 물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자세한 사례들은 꾸준히 습득하고 있다. 그런데 내 성격이 워낙에 너무 이래.

오늘 낮에는 대학원에서의 첫 시험을 쳤고, 교수님을 제외한 실험실 사람들 모두와 함께 퇴근해서 포닥 오빠의 집으로 몰려가 인스턴트 볶음면을 끓여서 만두와 떡볶이와 함께 먹었다. 배가 불러서 맥주를 반 병 밖에 마시지 않았다. 기분 좋아?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네, 너무. 원래는 다같이 영화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다들 너무 피곤하거나 바빠서 각자 집으로, 혹은 학교로 돌아갔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세탁기를 돌릴 요량으로 카운터에 가서 거스름돈을 얻으려는데 아저씨가 카프카 단편집을 읽고 있었다. 글자만 적힌 표지가 예뻐서 한마디 했다. 아저씨는 쿼터를 찾느라 서랍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카프카는 생전에 자기 글이 출판되는 걸 별로 원치 않아했어서 자기가 죽거든 자기 글을 태워 없애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카프카 친구가 그 말을 무시하고 책을 낸 거. 아저씨는 딱 봐도 슬라브인이다. 카프카처럼 체코에서 왔을까.

세탁기를 돌려두고 숙소 근처 편의점에 가서 생수과 탄산수를 사왔다. 마음이 진정되는 제일 확실한 경로 중 하나는 냉장고에 가득 들어있는 음료를 보는 것. 이제 건조기에서 세탁물을 꺼내와서 하나씩 잘 개키고 냉장고처럼 서랍도 가득 채우고 자러갈 생각이다. 그런데 수면은 무엇으로 메우나.



해질 무렵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바라봐주자고.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하겠냐고.



+ nick cave & the bad seeds - we no who u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