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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it takes a lot of courage to go out there and radiate your essence," 일주일 내내 어쩐지 계속 피곤에 쩔어 있었지만 기계처럼 삐걱대며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지칠 때까지 나를 내몰고 가장자리의 나를 구경하는 꼴이었다. 퇴근이 약간 늦어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자, 친구는 영화 상영시간에 늦겠다며 매운 걸 잘 먹냐고 묻더니("참, 너 한국인이지. 괜한 걸 물었네.")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그린 커리와 호이신 소스가 들어간 볶음면을 사두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학교 밥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몇 년을 살며 처음 가본 영화관 로비에는 표를 파는 할아버지의 앞을 못 보는 늙은 개가 앉아 있었고 화장실에는 박하사탕이며 카라멜 등이 잔뜩 쌓여있었다. 나와 친구는 팝콘과 사탕을 먹으며 를 봤다. 영화가 끝나자 기분이 무거워졌는데 영화 .. 더보기
"we're safe, we're cloaked in modern hearts," 이번 주에 친구들의 생일과 각종 행사가 몰려있어서 정신없이 밖으로 나다녔더니 피로는 곧잘 쏟아지듯 찾아왔고, 나는 자고 있을 때 제일 행복했지만 그건 자고 일어난 직후의 욱신거리는 기분이 별로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잠들어 있을 때에는 잠에 빠지는 단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Chelsea 집에는 아주 부드러운 붉은 천이 깔린 거대한 바구니 모양의 의자가 있는데 그 안에 웬만한 크기의 사람이 들어가면 폭 잠기게 되어서 Chelsea는 그걸 자궁womb이라고 부른다. 금요일 밤 즈음에는 정말 패배한 것처럼 피곤해져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떠드는 사이 나는 '자궁' 안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알바를 갔다가 뒤늦게 Chelsea 집에 온 친구가 거의 잠들기 직전의 나를 보더니 옆에 좀.. 더보기
"i'm perfectly able to hold my own hands, but i still can't kiss my own neck," 오늘 퇴근 전철을 타러 가다가 애들과 저녁으로 보스니아 음식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어제 영화 보러 놀러 오라는 것, 그저께 함께 맥주 마시자는 것, 그리고 지난 주에 작은 공연을 보러 오라는 것을 각각 선약이 있고 시간이 안 맞고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전례가 있어서, 게다가 보스니아 음식은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해서 이번 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너무 피곤해서 친구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서 시트콤을 봤다. 도시의 동남쪽으로 한참 차를 몰고 갔더니 사실 보스니아 음식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음식도 함께 파는 휑뎅그렁한 식당 하나가 나왔다. 요즘 날도 덥지 않은데 에어컨을 굳이 지나치게 틀어둔 식당이었다. 본요리도 맛있었지만 전채로 나온 체바피가 아주 맛있었다... 더보기
"tell me about your purple past story, will your story make me feel sorry," 전철문에 기대서 책을 읽다가, 오늘도 은행에 못 간 게 기억났다. 수중에 쿼터가 네 개 밖에 없었다. 귀가해보니 우편함에는 USPS 쪽지가 들어 있었고 대문에는 UPS 쪽지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주문한 책 같은데 다른 하나는 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USPS 쪽지에는 우편물 번호가 적혀있지 않아서 우체국에 소포를 찾으러 가야 하겠고, UPS 쪽지에는 집이 비어 있을 내일 낮 2시와 5시 사이에 배달을 한 번 더 감행하겠다는 말이 있길래 배달 시간을 조절하려고 알아봤더니 그러고 싶으면 5달러를 내라고 한다. 왜 너네들 마음대로만... 짜증이 났다. 더군다나 세탁물 바구니가 넘치기 직전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현민이가 마침 오늘 은행에 다녀왔다며 내 10달러짜리 지폐를 그만큼의 쿼터로 바꿔줬다.. 더보기
"could you pray for us, we know he loves you the best," 원래는 엄마 아빠께 보여 드리려고 방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에도 올린다. 오늘이 노동절이라 좀 길게 쉬어서 방 청소를 오래 하고 게을러서 석 달 동안 붙히지 않았던 사진들도 꺼내 문과 벽에 붙였다. 그런데 역시 게을러서 그 사진들을 전부 붙이지는 못하고 절반 정도만 띄엄띄엄 붙였다. 방문 바깥쪽에 붙힌 건 아주 예전에 산 아주 큰 엽서, 문을 열면 책상과 의자와 서랍과 책꽂이와 러그와 아직 못 비운 쓰레기통이 보이고, 내가 방에서의 생활을 팔 할 정도 해결하는 침대, 그 옆에는 옷과 각종 의약품을 담은 서랍장, 천장에 등이 없어 방의 주요한 광원인 스탠드와 대학 다닐 때 썼던 각종 교과서와 자료들을 꽂은 책꽂이, 붙박이장, 이게 전부다. 큰 방은 아니지만 작은 방도 아니어서 아늑하다. 책꽂이 위에는 평소 .. 더보기
"you blow your smoke in my face, that means you want me," 다들 뭔가를 규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나는 그런 집단적인 강박이 초라하게 예뻐 보여서 눈물이 났다. 해가 지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Purity Ring이 무대에 오르길 기다리면서 펌킨 에일을 마셨다. 옆에서 내가 사준 IPA를 마시고 있던 친구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나를 향해, 생각해봤는데, 너랑은 그냥 같이 시간 보내기 참 쉬워easy to chill with, 라고 소리쳤다. 며칠 전 나는 그 친구가 사용한 똑같은 문구로 그 친구를 남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직면한 상황이 신기해져서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친구를 새삼 쳐다봤다. 그건 우리가 생일이 비슷하기 때문이야, 그러면 성격도 비슷하거든. 그런 게 어딨어, 또 무슨 한국 미신이야? 아니면 네가 지어낸 거야?.. 더보기
"tell me, where would i go, tell me, what led you on, i'd love to know," 로레인을 따라 처음으로 핫 요가를 하고 나와(나는 내 몸에서 물이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파네라에 가서 늦은 저녁으로 샐러드를 주문했다. 서서 음식을 기다리며 어떤 대화를 나누던 도중 로레인은 '모른 척'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시적poetic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단순히 무시ignore하는 게 아니라 알지 못함을 가정한다pretend not to know는 것이 아니냐면서. '보고 싶다'라는 말도 풍미가 더 깊다고 했다. 나는 로레인에게, 그 말이 단순히 그리움I miss you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는 너의 형태를 보기를 소원한다I desire to see your figure로 들리기 때문이냐고 물었다. 로레인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며, 나에게 한국어가 영어보다 더 시적이지 않.. 더보기
"i love you, i love, rainbow, all the music is the rainbow," 방금까지 뭔가를 굉장히 많이 썼다가 다, 지웠다. 그 많은 단어들을 나열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지를 생각해보니 그냥 다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예진이가 보내준 책 중 가 있었다. 언젠가 예진이는 여러 번 읽어 색이 바랜 그 책을 나한테 보여주면서, 고등학생 때 이 책은 내 바이블이었어,라고 그랬었는데. 그랬던 책을 내가 받아도 되나 싶어 황송했다. 몇 주 전 친구의 친구가 책 을 추천해줘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미도 없고 영 정도 가지 않아서 내일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할 생각이다. 책을 여러 권 동시에 읽는, 그러다가 어떤 책은 결국 끝내지 못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어서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근본부터 너무 정신사납다. 오늘은 늦게 .. 더보기
"picture your body, hearing your voice, fall into your eyes," 지난 주말에는 원래 애들이랑 호숫가에 놀러 가서 낚시도 하고 물가에서 낮잠도 자고 고기도 구워 먹으려고 했는데 갑작스런 차편 문제로 모든 계획이 취소되어서 나는 다소 쓸쓸해했다. 친구가 나를 슬픔에서 구제해 다운타운에 있는 맥주 양조장에 나를 데려가줘서 덕분에 음악을 들으며 이른 저녁으로 홍합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친구가 두 번째 맥주를 받아오며, 이런 말 하는 것 참 이상하고 나도 이제야 깨달았는데 이 장소에 동양인이 너 뿐이야,라고 했다. 친구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문득 나의 다름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고). 이상하게 날씨가 너무 좋은 주말이었다. 늦은 오후부터는 심지어 선선하기까지 했다. 더더욱 물가에 갔어야 했던 날씨였다. 친구와 나는 후식으로 프로즌 커스터드까지 먹고 공원으로 향했다. 라.. 더보기
"details of your look, like your touch, killing me by shoot," 타협과 협상은 다르다. 나는 전자만 능숙하게 할 줄 알고 후자를 해내야 할 경우에는 많이 버벅댄다. 조용하게 협상하는 사람들이 무섭고, 부럽고, 다시 무섭다. 오늘은 일하던 도중 남는 시간에, 박사님과 함께 아는 언니의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보러 옆 건물로 갔다. 언니는 발표 후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감정이 북받쳤는지 조금 울었다. 몇 달 전 졸업식 때 더위에 허덕이던 나와 예진이가, 박사 학위 받는 사람들의 가운과 모자를 보고 감탄하며 박사 할 맛 나겠다고 농담을 할 때에도 언니는 박사 후드를 뒤집어 쓰다가 울컥 울었다고 했다. 고생했던 기억이 쏟아지듯 다가온다고. 우리 건물로 돌아가면서 박사님은 너도 몇 년 후 발표 끝나고 엉엉 우는 거 아니냐고 하셨다. 글쎄요, 그건 일단 대학원 들어가고 나서 생각.. 더보기
"lonely trees, i'll give them company," 아쉬워한다. 오래 전 빌려주고 여태 돌려받지 못한 책. 귀찮아서 미룬 손빨래.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 실험. 회복하고 싶은 관계(와 회복하고 싶지 않은 관계). 내려 받지 못한 앨범(과 괜히 내려 받은 앨범). 사지 못하고 뒤돌아야 했던 양초. 쉽게 깜박이는 전등. 함께 갈 사람이 없는 공연. 물이 있는 곳에 갈 수 없는 생활. 이사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 이 집은 냉온방이 공짜라 굳이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퇴근해서 더운 길을 오래 걷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듯 내 방문을 열었을 때 변함없이 웅웅거리며 공기를 뿜고 있는 에어컨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를 위해 버텨주었다는 생각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 위에 누워 있으면 천과 살이 붙는 공간이, 내가 열을 억지로 가두고 있는 것처럼 금세 더워져서 .. 더보기
그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그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나도 꽤 내성적인데, 걔는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내성적인 것 같아."), 나는 그게 농담인줄 알고 음식 씹던 걸 멈췄다. 너는 너무 싱싱해서 종종 떠들썩하고, 요란한 걸 좋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하고. 나는 거기에 자주 웃고 손뼉을 치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고("네가 내성적이라고?") 그는 눈을 깜빡이며 그렇다고 했다. 화제가 바뀌었다. 그는 자꾸만 농담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농담이 아닌 이야기들을 농담처럼 풀어냈고 나는 그때마다 음식을 씹었다 말았다 했다. 후식처럼, 우리는 서로의 인생이 망해갈 수 있는 경로에 대해 수학적으로 이야기했다. 귀여운 자학 수준이던 것들이 이제는 현실이 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보기
간호사는 내 팔의 멍이 자기가 찌른 바늘 / Sun Glitters - High / 간호사는 내 팔의 멍이 자기가 찌른 바늘 때문에 생긴 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난 번에는 왼팔이었으니 이번에는 오른팔에 검사를 하자며 투베르쿨린을 내 팔에 주사하다가 이 멍 좀 봐, 최근에 피 뽑았어요?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지난 주에 내 피를 뽑으려다 실패하지 않았냐고 묻자 웃으며 어머 내가 그랬나 미안, 하지만 나는 이 검사를 너무 여러 사람에게 해주니까요, 라면서. 전혀 멋쩍어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건물을 나서자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어지러웠다. 나는 탈지면에서 알콜기가 완전히 가실 때까지 팔을 붙잡고 있다가 실험실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바짝 마른 탈지면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양팔이 얼룩덜룩했다.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심리학.. 더보기
며칠 전 올해의 첫 매미가 울 때 / Tame Impala - It Is Not Mean To Be / 며칠 전 올해의 첫 매미가 울 때 비로소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요새 들어 해가 꽤 강해지고 있지만 종일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다 보면 별로 더운 줄을 모르겠어서 편하다. 자전거 자물쇠가 고장이 나서 전철역까지 걸어다니고 있지만 오전에는 별로 덥지 않으니까. 퇴근길은 좀 덥지만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은 기분이 좋기 때문에 괜찮다. 여름에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을 골라 듣는다. 낡은 건물에서 살고 있지만 덕분인지 냉난방이 공짜라, 지난 주 신이 나서 에어컨을 실컷 틀어두고 잤다가 편도가 부어서 나는 심하게 앓았다. 아무리 껴입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결국 반차를 쓰고 일찍 퇴근했는데 해열제를 먹고 자다가도 추워서 몇 번을.. 더보기
하늘에 정전기가 일 때 시규어 로스의 Varúð를 / Sigur Rós - Varúð / 하늘에 정전기가 일 때 시규어 로스의 Varú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끔 번개,까지는 아니어도 카메라 플래쉬가 연달아 터지듯 밤하늘이 천둥 없이 아주 번쩍일 때가 있는데 기정이랑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자던 재작년 여름에는 그게 굉장히 심해서 한밤중에 나 혼자 종종 깨곤 했다. 꽤 오래 그런 하늘을 본 적이 없었는데 도서관 카페에 있다가 잔뜩 스트레스만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밤의 하늘이 오랜만에 번쩍였다. 어떤 경로로 우연하게 Valtari의 리크가 생겨 있던 덕분에 Varúð를 들으며 올려다 본 하늘은 굉장했다. 세상이 우아하게 멸망하기 직전 같았다. 집에 돌아와 때맞춰 통화를 하게 된 훈제에게 내가 방금 시규어 로스를 들으면서 집에 오다가 아주 멋진 걸 봤는데, 다.. 더보기
엄마가 귀국하시기 하루 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 2:54 - You're Early / 엄마가 귀국하시기 하루 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백 년도 더 된 옛 집(게다가 내 방은 북향)을 안 좋아하셨던 엄마는 새 집을 보자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다며 굉장히 흡족해하셨다. 짐도 짐이지만 가구를 옮길 재간이 없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인부들을 불렀는데(이사에 네 도움이 필요없게 되었다고 했더니 관우는 "하여간에 부모님이 오시면 헝그리 정신이 없어진다니까"라고 했다) 일이 수월하게 처리되는 걸 옆에서 보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 동안 엄마는 부엌에서 그릇이 든 상자를 여시면서 딸 시집 보낸 것 같다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에 엄마를 공항에 데려다 드리고 돌아왔는데 다시 잠들지 못해서 짐 정리나 계속 했다. 집 나와 사는.. 더보기
기말고사가 모조리 끝나고 집을 치우고 졸업생들 행사에 / Beach House - Walk In The Park / 기말고사가 모조리 끝나고 집을 치우고, 졸업생들 행사에 참여하고 아쉬워서 자꾸만 사람들을 만나고, 엄마가 오시고 나는 졸업을 하고, 지금은 엄마와 둘이서 여행 중이다. 스마트폰도 없는데 호텔에서 돈 주고 와이파이 쓰는 건 싫어서 인터넷 사용이 용이하지 않다 보니 구글 리더에는 읽지 않은 피드가 수백 개 쌓여 있다. 내일이면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 이사 준비를 한다. 엄마는 이사 다음날 귀국하신다. 총체적으로 정신이 없다. 아마도 6월 초부터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텐데 공부를 이렇게 쉬어본 적이 참 오랜만이라 모든 것이 생경하다. 이내 느릿한 여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지난 여름들의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결국 여기서 또 여름을 맞는다. 한.. 더보기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 신호등을 지나면서부터 Kent의 / Kent - 747 /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 신호등을 지나면서부터 Kent의 747을 들었는데 도입부에서 올려다 본 달은 손톱처럼 가늘고 창백했다. 해가 막 지려던 참이라 하늘은 보라색과 분홍색의 중간이었는데 달 아래에 그어진 비행운은 붉게 예뻤다. 도서관에 도착해 문을 열 때 마침 노래가 끝이 났고 그 덕에 나는 꼬박 7분 47초를 걸었음을 알았다. 이건 그저께의 일. 747을 듣기 시작한 건 지난 주에, 티볼리에서 다르덴 형제Dardenne의 를 보고 학교로 돌아가 늦은 저녁을 먹을 때 진석이가 그 노래를 가르쳐 준 이후, 다소 습관적으로. Kent의 열번째 앨범이 나온 건 오늘. 어제 오후에 이어서 오늘 아침에는 대학에서의 마지막 in-class 시험을 봤고. 금요일은 수업이 없으니까 내일은 .. 더보기
심포지엄 등록을 하고는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 Nils Frahm - More / 심포지엄 등록을 하고는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집 앞 카페에 도착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커피를 사려고 줄 서있던 친구가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왜 양복을 입고 있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심포지엄 진행요원 카드를 꺼내 보이며, 오늘 아침에 참가자들 체크인 하는데 오전 세션에서는 딱 너만 안 왔더라고 했다. 종이에 적힌 네 이름을 가리키며 이 사람 아냐고 서로에게 묻고 있는 다른 진행요원들에게 나 너 안다고, 너 전화번호 있다고 할까 하다가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말았지,라고 말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머쓱해져서, 아파서 못 간 거라고 대답하는데 마침맞게 기침이 요란하게 연달아 터져주었고 내 주장의 신빙성은 올라갔을 .. 더보기
얼마 전에야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걸 / Mogwai - I'm Jim Morrison I'm Dead / 얼마 전에야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여태 모르고 살 수 있었냐는 내 질문에, 늦게나마 그 딱지가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것 같지 않니?라며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핸드폰을 만지는 것이었다. 화제전환은 너무 빨라서 많은 단어들은 사람들과의 제각각인 부딪침, 다음날 저녁과 밤의 계획, 자기가 거절한 여자들과 자기가 끌리는 여자들의 특징들을 돌고 돌더니 나중에는 만성적인 불면증에 대해서까지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멜라토닌을 여러 알 삼키고 나서야 생각들을 잠재우고 겨우 잠이 들었다고 하길래 나는, 그렇게나 많이 먹어야 잠이 오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술을 줄이는 건 어떠냐고 물었지만 술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면서(".. 더보기
오늘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잡담을 하며 잡숙제를 / Destroyer - Chinatown / 오늘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잡담을 하며 잡숙제를 하다가, 저명한 교수님의 강연이 있다고 들어서 그걸 보러 갔다. 강의실은 금세 가득 찼고 교수님이 강연을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필기를 했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연설용 목소리는 낮을수록 좋다고 했었지, 그게 청중에게 더 많은 신뢰를 준다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그러다 강의 중반 정도 되어서야 교수님이 트렌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본인이 직접 언급했다). 약간은 놀랐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애매한 목소리가 설명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존경심이 들었던 것이, 그 교수님이 두 가지 성별을 다 살아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계에서 여자.. 더보기
메트로를 타고 의대로 가면서 졸 뻔했다 그렇게 / Bag Raiders - Sunlight / 메트로를 타고 의대로 가면서 졸 뻔했다. 그렇게 쭉 자버리면 위험한 동쪽 동네로 가버리니까, 눈을 비비면서 신나는 음악만 들었다. 껌도 씹었다. 오늘은 일이 약간 길어져서 테크니션 언니와 함께 실험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의대 캠퍼스라 그런지 주변에 이런저런 병원들이 많은데 소아전문병원 식당이 실험실과 가까워서 가끔 거기서 밥을 사먹곤 한다. 학교로 돌아와서는 약간 늦게 스크리닝에 들어가서 맨 뒷줄에 앉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다가 좀 졸았다. 도서관에서 페이퍼를 쓰다가 잠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에 짐을 챙겼는데 그걸 본 조쉬 오빠가 왠일로 벌써 집에 가냐고 했다. 그치, 그렇지만 오늘만... 밖으로 나왔을 땐 낮의 잔열로 공기가 텁텁했다. 아침 일찍 입고.. 더보기
어릴 때부터 과학소녀는 아니고 그냥 잡궁금함이 많았던 / Sóley - Pretty Face / (from WashU Problem Facebook) 어릴 때부터 과학소녀...는 아니고 그냥 잡궁금함이 많았던 나는(고1까지는 나 자신을 이과로 분류하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비구름의 경계가 한 구역을 지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곤 했는데 한 번도 그걸 직접 겪은 적이 없어서 그 상상은 항상 상상에서만 그쳤다. 몇년 전 이 날씨 변덕 심한 도시에 온 이후로는 그걸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는데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같은 학교 캠퍼스의 한 쪽은 비를 맞고 다른 쪽은 해를 쬔다. 전철역에서 학교로 걸어가는데, 올려다본 하늘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쪽은 지옥, 저쪽은 약속의 땅. 너무, 보란듯이 양가적이어서 우스울 정도로. 불행은 내가 하루를 보낸 의대 캠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