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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i'm perfectly able to hold my own hands, but i still can't kiss my own neck,"


오늘 퇴근 전철을 타러 가다가 애들과 저녁으로 보스니아 음식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어제 영화 보러 놀러 오라는 것, 그저께 함께 맥주 마시자는 것, 그리고 지난 주에 작은 공연을 보러 오라는 것을 각각 선약이 있고 시간이 안 맞고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전례가 있어서, 게다가 보스니아 음식은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해서 이번 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너무 피곤해서 친구가 나를 데리러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서 시트콤을 봤다. 도시의 동남쪽으로 한참 차를 몰고 갔더니 사실 보스니아 음식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음식도 함께 파는 휑뎅그렁한 식당 하나가 나왔다. 요즘 날도 덥지 않은데 에어컨을 굳이 지나치게 틀어둔 식당이었다. 본요리도 맛있었지만 전채로 나온 체바피가 아주 맛있었다. 오늘 만난 친구들은 모아두면 대부분 헛소리들을 하다가도 어떻게 보면 또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는 애들이라 나는 한마디씩 던지며 즐겁게 참관하였다. 그 옛날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어떻게 욕설이 독자적 혹은 독립적으로 그러나 비슷한 방향으로 생성되었는가, 태교와 성(性) 호르몬과 손가락 길이의 상관관계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나, 느리고 느긋하고 긴 식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웃음과 함께 뒤죽박죽으로 오갔다. 물론, 지금 네가 입은 폴로 셔츠는 롬니가 연설할 때 그의 뒤에서 입고 서 있기 딱 좋을 정도로 웃기지도 않게 얌전하고 보수적인 색상과 디자인이다, 우리 연구실에는 어떻게 된 건지 남자 학부생들만 들어와서 칙칙해서 못 살겠다, 따위의 시덥잖은 농담도 나눴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식사 후 모과 브랜디를 한 잔씩 주문했는데 quince가 어떤 과일인지 몰라서 스마트폰으로 구글 검색을 해 본 나는 모과가 미국에도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친구들은 반대로 한국에도 quince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했다. 식당 밖으로 나와서 밤바람을 맞다가 식당 안이 얼마나 추웠는지를 새삼 깨달으면서 차에 올랐다.


지난 주에 난생 처음 스마트폰을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한지 벌써 일주일 째다. 일단 카톡과 스카입 등으로 핸드폰을 사용한 부모님과의 연락이 용이해져서 부모님이 많이 좋아하신다. 시카고를 떠나더니 연락을 아주 드물게 해오던 수화와의 연락도 잦아졌고 다른 친구들과도 간간히 연락을 한다. 성우가 칭찬하던, 내가 잠을 얕게 자고 있을 때를 파악해서 모닝콜을 울려주는 앱도 다운 받아 사용하고 있고 스포티파이도 연동해서 쓰고 있다. 스마트폰을 샀더니 편한 점들이 여럿 생겼다고 훈련소에 있는 동생에게 인터넷 편지로 알려주었다. 얼마 전 안철수 교수가 드디어 대선 출마 입장을 밝히며 윌리엄 깁슨의 말을 인용한 모양인데 Neuromancer를 그렇게 좋아하며 내게 그 책을 읽을 것을 강요하던 네 생각이 나더라,고도 썼다. 동생은 A Scanner Darkly나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같은 필립 K. 딕의 소설이나 척 팔라닉 같이 꽤 웃기지만 하드코어한 소설, 아니면 A Clockwork Orange나 Catch-22, The Road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좋아한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동생이 읽는 책들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는 여태 동생들이 사 모은 책 중 제대로 읽은 것이 The Road밖에 없다. 나머지들은 손도 안 댔거나, 읽다가 결국 끝내지 못했다. 동생은 내가 자기에게 Atonement나 Never Let Me Go 따위를 읽으라고 추천한다며 하하 웃었다. 그 두 권도 동생이 읽는 책들과, 어찌 보면 비슷하게 칙칙한 책들일텐데 표지가 알록달록하기 때문에, 혹은 누나는 자기보다 밝을 거라는 선입견에 동생은 그 책들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 한 걸지도 모른다.


몹시 피곤하다.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한 시간 동안 하품 밖에 하지 않았다. 그건 커피 같은 걸로는 도무지 해소가 되지 않을, 삼십 분 정도라도 어디 숨어서 깜빡 자야지만 해결될 그런 졸림이었다. 물론 사정상 그렇게 잠들지는 못했다. (적어도) 나는 금요일 출근보다 월요일 출근이 차라리 낫다. 주말 동안 푹 쉬고 논 이후의 월요일에는 일할 맛이라도 나지, 월화수목 나흘을 꾸준히 일에 시달린 이후의 금요일에는 체력이고 의욕이고 뭐고 내게 남아있어주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아서 기분이 그야말로 거지같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음악을 작게 그리고 에어컨을 세게 틀어둔 방 안에서 옷을 얇게 입고 이불에 돌돌 말린 채로 침대에 누워서 하품을 하며 책만 한껏 읽고 싶다. GRE를 공부하고 실험실에 나가던 작년 여름 나와 한 집에서 살았던 Tina에게, 딱 하루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고 싶다고 했더니 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러면 하루종일 뭘 할 거냐고 물었다. 말했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숨만 쉬고 싶다니까? 내 대답에, 그렇게 하면 심심하지 않겠냐며 Tina는 깔깔 웃었다. 그 말을 듣자 이 세상에 게으른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덜컥 불안해졌다. 나는 미치지 않으려고 과학을 하고 지치지 않으려고 시를 읽고 쓴다고 줄곧 생각해왔지만 태생적으로 귀찮음이 너무 많아 볼품없이 미치고 지친 상태로 마냥 늙어갈까봐, 그게 걱정이다.



+ wye oak - civil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