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간의 돛단배

"i lie awake, dreaming of the landscapes in the rain," 각종 학교 서류를 처리하고, 모르는 도시에서 무턱대고 모르는 버스에 올라 관공서에 다녀오고, 첫 로테이션 연구실을 정하고, 며칠 머뭇대다가 숙소 계약을 연장하고. 그러면서 생애 최악의 시차증후군을 겪었다. 그래도 이제 건강보험만 고르면 내가 혼자 알아서 해야 할 것들은 다 끝난다. 정착의 초반이 이렇게 지난다. 나는 이렇게 지낸다. 지내는 곳 특성상 부엌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이 아쉽다. 물론 모든 걸 누릴 순 없겠지만, 요리해먹던 세월이 몇 년째이다보니 아쉬움을 쉬이 숨길 수 없네. 그 와중에,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불편해서 어떻게 그러고 사냐(여자)', 또는 '어차피 몇 달 안 있을 거니 그냥 밥 사먹고 지내라(남자)', 성별에 따라 양분되는 양상이 신기하다. 며칠 전 아는 분의 도움으로 .. 더보기
지내다보면 지날 수 있는 이런 이야기의 방식을 설명 대신 약속해, 미국을 떠나던 비행기에서 잠이 오지 않던 나는 머리 위의 독서등을 켰고 굉장히 오랜만에 김경주 시집을 열자 펼쳐든 페이지에서 "처음으로 내가 입에 담배를 물려 준 여자가 있습니다" -라는 낯익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고 순간 나는 늦은 오후와 저녁과 한밤과 새벽과 하루를 통과해 봄비가 내려 옅은 흙냄새가 나던 이른 아침 공기 거기에 젖어들던 담배 냄새 그것들과 함께 동이 트던 공원 옆길 거기에서 조깅하고 있던 내가 모르는 사람들 혹은 내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피곤한 체온들 역시나 끌어안던 빈 어깨들 내 방을 벗어난 사거리와 고속도로와 주차장과 공항의 마지막을 순서대로 생각하다가 이제부터라도 조금은, 흐르는 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다짐하고는 비행기 특유의 소음을 못 이긴 척 .. 더보기
구름은 두껍고 어둡게 내 방은 밝고 환하게 너는 멀리서 아름답게, 아주 예전부터 줄곧 생각해왔다, 잠드는 과정sleep 없이 잠들어 있을asleep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촛불이 입김 앞에서 순식간에 꺼지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건 좋다. 수면의 길이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온전한 나라. 태초부터 나의 내부에 있었던 공간이다. 나 하나만으로도 동서남북이 가득해진다. 아늑하다. 누가 굳이 나를 떠밀지 않아도 거기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잠에 입국하는 건 너무, 번거로워. 거의 껄끄러울 정도다. 의식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모든 통로가 거칠다. 마치 입자가 굵은 구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식도 없이 비가 내리면 좋겠다. 내 침실이 넘치도록. 한낮의 더위가 빗물에 미끄러지듯 사정없이 잠에 빠지고 싶다. 오늘도 잘 자고 내일도 잘 일어나. 너도. 보고 싶어. 나.. 더보기
내 손에 있는 모든 잔상처의 역사는 세상에서 너만 알아, 공연을 보는 내내 등이 더워서 기분이 좋았다.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이 어두웠고 날이 선선해져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걷다가 결국 버스를 한참 타고 번화가로 갔다. 시간이 애매했다. 밥집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어서 길에서 조금 헤매다 어떤 술집에 들어갔다. 가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식사를 하던 종업원이 주문을 받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 작년에 함께 봤던 영화 이야기를 했다. 네가 말했다. 그때 그 여자 남자친구가 여자더러 꼬마애와 자기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닦달했더니, 여자가 꼬마애를 고르잖아, 뜬금없이. 그러면 남자는 차에서 내리고. 그 부분이 난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말했다, 또는 말하고 싶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접했던 다.. 더보기
미분 가능하면 연속이라지만 영속은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나는 이 습득을 원한 적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받은 새 데빗카드를 찾으려고, 잡다한 서류를 모아둔 꾸러미를 열심히 뒤지다가 몇 년에 걸쳐 모은 카드와 편지 묶음을 찾았다. 생일 축하 카드가 제일 많았고 졸업 축하 카드, 친구들이 여행 가서 보내온 카드, 그동안 고마웠다는 카드, 그냥 네가 생각나서 썼다는 카드 등등 여러가지가 섞여 있었다. 그 묶음에는 내가 오며가며 사두고 미처 쓰지 못한 카드도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카드를 보자마자 문득 예전에 방을 같이 썼던 애 생각이 나서. 그래서 곧 있을 졸업도 축하할 겸 책상에 앉아 바로 카드를 썼다. 펜에서 잉크가 새어나와서 손이 더러워졌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과 졸업식을 지켜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도 옛날 이야기를 적었다. 그랬더.. 더보기
"it hurts to breath around you, my lungs fill up with sea," 미국에서 쓰던 노트북에 맞는 어댑터가 없어서 코첼라에서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찍었던 사진도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나는 뭐든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아빠 엄마는 정리왕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정리정돈 및 청소를 제일 잘한다. 내가 만지는 내 주변은 아빠 엄마의 정리의 정의에서 약간 벗어난다. 내가 늘어놓는 물건들에도 나름의 순서와 질서가 있지만 그게 모든 사람들의 기준에는 들어맞지 않으니까, 타협이 필요하다. 한국에 돌아와 며칠 동안 물가(부산항, 광안리, 이기대, 우도, 비양도, 협재, 해안도로, 쇠소깍, 용두암 근처)를 집중적으로 맴돌았더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직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신발.. 더보기
네가 나의 여전한 시간을 본다 말할 때 문득 뭉쳐오는 간격이 있어, Mindlessly, I went to watch a movie with you. I can't really recall any of our conversation on our way. My phone buzzed in my pocket. This guy who spotted you and me from a distance was half-jokingly asking me if we were dating. I texted him back: No. You complained about overpriced movie tickets. We sat in the darkness for a while. The screen lit up like a nightlight. I sank deep down in my sea.. 더보기
너는 오늘 아침 당장 꽃 피어도 내 하루의 어느 한 곳은 여태 겨울이야, 주말에 폭설이 온다길래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잠들락말락 깜빡이던 토요일 새벽부터 얼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나더니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블라인드를 제치고 밖을 내다보자 정말로 꽤 많은 양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겨울이었다. 새들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발은 거세어졌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에 코트도 목도리도 벗지 않고 거실 소파에 쓰러져서 그대로 낮잠을 잤는데, 두 시간 정도 자다가 눈을 뜨자 창밖으로 온통 하얀 풍경이 보였다. 한동안 그렇게 쇼파에 엎드려서 멍청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았다. 플로리다에 가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겨울이 되어도 눈 구경할 일이 없을 텐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벌떡 일어나, 일주.. 더보기
"we're in a natural spring, with this gentle sting between us," 지난 여름 의대 전철역에서 자꾸만 마주치던 친구가 있었다. 친분이 두터운 친구는 아니지만 같이 수업 들은 적도 있고 해서 만나면 서로에게 안부 정도 묻는 친구인데 그 여름에는 하도 자주 마주쳐서, 이것도 인연이니 함께 날을 잡아 밥을 먹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퇴근하고 의대 근처 술집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요즘 뭐하냐고 묻는 나에게 걔는,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아서 낮에는 의대에서 일하고 밤에는 의대 원서를 준비한다고 했다. 외국인으로 여기 의대 문을 뚫기가 힘들 법도 한데 웃으면서 준비가 잘 되어간다고 했다. 평소 지켜본 바에 의하면 워낙 열심히 살던 애라 그럴 만도 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학에 온 이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놀라서 물었다. 나도 집에 자주 가는 편은 .. 더보기
"you're insignificant, a small piece, an ism, no more no less," 내가 내 글에서 '생각하다'라는 동사를 얼마나 자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메스껍다. 예전부터 운명의 영향력과 의지의 영향력을 각각 절반씩 믿어왔다. 여전히 유효한 이 믿음의 구조는 유전자의 영향력과 환경의 영향력을 믿는 태도와 병렬을 이룬다. 의지의 역량은 무한하지만 운명 또한 내 삶에 분명한 테두리를 긋고 있음을 안다. 테두리가 허락한 범위는 절망적일 정도가 아니라 억울함이 없다. 운명과 의지의 접점은 늘 적당한 만큼만 흥미롭다. 가끔 흔들리고 있어도 지나고 보면 쉽게 납득하게 되는 형태다. 과학적인 믿음은 없다. 믿음을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믿음은 믿음의 믿음성(~ness)을 조금씩 잃고 천천히 퇴색한다. 더 나아가, 누군가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게 되는 순간 그 믿음은 더는 믿음이 아니게 .. 더보기
"what is this new body, what am i supposed to feel,"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남자인 소설가가 여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When people are contented and have nothing to do, emotion spreads like a malignant tumor." "It is impossible for ordinary people to tell a thoroughgoing lie. Deception always gives itself away. ... Pure truth, on the other hand, is thoroughly destructive and leads nowhere." "He went through life as if.. 더보기
"when you scan the radio, i hope this song will guide you home," 저녁을 먹고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사나웠다. 꼭, 공기가 한국 같아. 그러네, 길에 사람 없는 것만 빼면. 사실 우리가 한국에서 함께 밥 먹었던 건 딱 한 번 뿐인데. 먼 이야기는 반드시 멀고 멀게 돌고 돌아서만 나에게로 온다. 나와 이야기 사이에 엉망으로 구겨져있는 시간을 본다. 바라보는 대신 구경하는 내가 때로는 끔찍하고. 구기면 구길수록 거리가 좁아지는 길바닥이야말로 곧 기억이고 이를테면 추억이네요. 감정의 부재(不在)를 질책당한 이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감정이 생각을 앞설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으려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 제한적이다. 뛰고 있거나, 자고 있거나, 술을 마시고 있거나. 어제는 퇴근길에 손바닥만한 스케치북과.. 더보기
"you get what you want, when you just want what you get," 어떤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지. 그 장소에서 보낸 기간의 길이와 밀도, 두 가지의 조화로운 충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잠깐의 여행이나 방문만으로도 그곳에 '살았다'고, 그곳이 '집'이었다고 숨쉬듯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면서도 부럽다. 일시적인 행위의 단기적인 집합만으로도 어느 장소에 살았음이 성립하는 경우도 있구나, 싶어서. 당신들의 기준은 뭐야? 그런 비현실적인 애정은 어떻게 생기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의 여자애는 말갛게 웃으면서 잠깐 같이 있어도 같이 사는 거잖아, 라고 말한다. 정말? 물론 나도, 내가 머물렀던 모든 곳에 개별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룻밤이라도 잤던 모든 곳은 저마다 조금씩 나의 시간을 그러쥐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곳이 그립다... 더보기
"excuse me, is my rant taking too long," 오늘의 어떤 이 분 남짓은 정말 영화 같았다. 끔찍했고,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음이 더 끔찍했다. 그런데, 영화 같다는 건 뭐지? 모서리를 만지면서 한참 생각했다. 나를 살고 있는 나를, 나의 바깥에서 내가 관람하게 될 때, 인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경로는 정말 영화 같았다. 그래서 생각이 자꾸 돌고 돌았다. 내가 나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면서 걱정을 했다. 여러 사람에게 주지 받은, 과학에서의 절대 금기는 과장과 허풍overstate. 그런데 난 인생을 과장한다. 물론 생활을 과장하지 않을 순 있어, 생활은 인생의 부분이니까. 그렇지만 결국 생활은 인생이 될 순 없는 거구나. 별 수 없네. 오늘부터 월급이 정상화되었다.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로 자랑을 하자 엄마는 얼마니? 하고 .. 더보기
연초에 하는 이런저런 연말 결산 (2012) 역시나 늦은 "2012년 뒤돌아보기"이다. 작년에는 문화생활(?) 결산만 했는데 이번에는 범위를 좀 더 넓혀본다. 2012년의 행적: 돌이켜보면 아주 매우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뭔가 기념비적인 일 세 가지만 거론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2년의 졸업:→ 단과대 졸업식과 공식 졸업식 이틀에 걸쳐 찍은 수백 장의 사진들을 다 올릴 수 없으므로 간단히 추리자면 2012년의 취직:→ 일하는 사진을 누가 와서 찍어주는 것이 아니므로 퇴근 후 내 방에서 사원증을 들고 찍은 셀카를 올리자면 2012년의 원서:→ 이 정신없던 과정을 공들여 사진 찍어두지는 않았으므로 Arrested Development의 짤을 빌리자면 아 물론 2012년의 이사도 있지만 지금 몇 년째 매년 이사하고 있으므로 추가 설명은 생략합니다... 더보기
"until morning breaks, we're sunk in sleep," 내가 가만히 봤던 고요는 이런 것들이야: 그런데 요 며칠,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광경을 못 본다. 꼴에 겨울이라고 하늘이 잔뜩 흐려서 아침마다 머리가 무겁다. 누가 건드리면 펑펑펑 눈을 쏟을 것 같은 하늘인데 어쩐지 눈은 딱 한 번 밖에 오지 않았고. 일주일 전 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 뉴스를 보니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어 있었고 나는 놀라지 않았고 대문을 닫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친구는 쩍쩍 하품을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고 나는, 전에 내가 말했던 그 여자 대선 후보 있잖아, 지금 개표 거의 다 끝나간다는데 그 사람이 대통령 될 거 같아, 했다. 친구는 아이팟으로 노래를 고르면서, 그래? 섹시해Is she hot? 물었다. 내가 주저하며 웃자 친구도 웃으며 차를 몰다가 당선.. 더보기
"한 그리움이 여길 지납니다, 이곳은 갑자기 수축하고 그 길 따라 휘어진 걸요," It is hard to put certain things into words, so please forgive flaws in this rant and general ineffability of the subject matter. Like someone said, if each individual is actually a universe experiencing its own colorful subjectivity, then I do not have any reason not to appreciate your iridescent surface as I would appreciate my very own. I get pretty easily impressed anyways, especially by som.. 더보기
"i have to celebrate you baby, i have to praise you like i should," 내가 나에게 몰입하는 만큼 당신(들)도 당신(들)에게 몰입해줬으면 좋겠다. 한국에는 폭설이 왔다는데 여기는 아직도 너무 포근하다. 지난 주말 이후로 조금씩 추워질 거라더니 거짓말이었던 건지. 오늘은 퇴근하면서 땀이 나길래 코트를 벗어 손에 들고 걸었다. 오히려 아침보다 더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대학에 오기 이전의 세월 대부분을 아열대 지방에서 보낸 친구는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이런 가을 같은 날씨에 반색하다가도, 안 추워서 좋긴 한데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네... 운전을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다고? 응, 12월인데 왜 이렇게 따뜻하지? 전에 말했잖아, 지구 멸망한다니까. 마야력 말하는 거지, 언제였지 그게? 글쎄, 21일인가. 음. 엇, 그러고 보니까 그날 너 한국 가는 날 아니야? 응. 이런.. 더보기
"i wonder if i'm allowed ever to see," Uta Barth의 사진을 처음 봤던 건 작년 여름. 그때 나는 상황에 지쳐서 모든 걸 팽개치고 시카고로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조금씩 울다 말다 했다. 한밤중에 버스에서 내렸는데 6월인데도 끔찍하게 추웠다. 그 다음 날도 추웠다. 수화랑 잠바주스를 마시면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미술관에 들어갔는데 마침 Uta Barth의 사진전이 진행 중이었다. 사진들이 빛으로 너무 투명해서 생경했는데 수화는 사진들이 별로였는지 뭐냐 이게, 나가자,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영화를 찍으면 오프닝 시퀀스는 이렇게 해야지,라고 몇 년 전에 생각했던 장면들과 똑같은 사진들이 있어서 몰래 놀랐다. 그 주말 이후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고 날은 더웠다. 어떨 땐 학교 미대 도서관에 들어가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리다가 Uta B.. 더보기
"where do you live, love is a place, where are you from," 기다리던 휴일이어도 시기가 시기인지라 글을 쓰고 남에게 내 글을 꾸역꾸역 읽히느라 정신이 없다. 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쉬고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같은 글을 계속 읽으니 어지럽기도 하다. 너 이 글 막 썼냐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냥 (당연하게도) 짜증만 났는데 왜 이렇게 절제했냐고, 고민하는 모습이 읽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오히려 울컥했다. 자칫하다가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그 상태 그대로 흑흑댈 수도 있었어, 물론 그러지는 않았지, 그렇게 나약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가끔 나에게로 지나치게 수렴한다. 그리고 나는 가끔 초라하게 단단한 나의 수렴을 너무 쉽게 발각당한다. 좋은 것들만 타인에게 발굴당하면 좋을 텐데. 당신들이 내게서 찾아낸 것이 고작 오랜 시간을 통과한 내 수렴 따위라서, .. 더보기
"i floated in those words, i don't even know why i feel what i feel," 나를 타이르는 말들을 경건하게 새겨 듣고 며칠을 죄책감 없이 쉬었다. 잠을 억지로 많이 자서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왠지 내가 이불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나는 자다가도 웃었다. 당장의 게으름은 좋다. 부인할 수 없다. 아무런 해악 없이 뒹굴거리는 것들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금요일에 이어 토요일에도 날이 반짝 더워져서 잠깐 땀을 흘리다가 친구의 차를 타고 공원에 갔다. 언덕에 누워서 사람들이 연 날리는 걸 구경하니 기분이 좋았다. 왠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4월을 과학의 달이라고 하면서 이런 저런 행사를 했거든, 그래서 초등학생 때 같은 반 친구들은 모형 비행기 대회 같은 거에 참가하고 그랬어. 너도 그런 대회 나갔어? 아니, 난 그런 거 잘 못 했으니까, 연도 못 날렸는 걸. 그런데 오늘은 늦은 낮부터 비.. 더보기
"we tried to be invisible, it only made us miserable," 요새는 아침마다 팔자 좋게 친구의 차를 타고 출근한다. 나처럼 의대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 한 명이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일하는 건물이 의대 근처 전철역에서 멀어서 출근하다가 열불이 나버린 그 애가 얼마 전 드디어 중고차를 산 것. 이 주 전 쯤 늦잠을 자버려서 전철역까지 갈 시간이 없길래 나보다 살짝 늦게 출근하는 그 애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얻어탔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편하길래, 그 이후로는 별 일 없으면 그 애와 같이 출근한다. 저녁 샤워를 하는 친구는 항상 출근 이삼십 분 전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차에 시동을 걸고, 사거리에서 행인이나 다른 차가 갑자기 뛰어들면 욕도 격하게 해가며 7분 남짓 차를 몰다가 내가 일하는 건물 근처에 도착하면 나를 내려주고 유턴을 해서 자기 건물로 향한다... 더보기
"you play my only tune, like you always do, and it keeps my feet upon the ground," 퇴근 전차에서 내 옆에 앉은 한 노인은 검은색 노트북 가방 위에 낡은 피아노 악보를 펴두고 손가락으로 가상의 피아노 건반 누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퇴근이 빨라 기분이 살짝 좋은 상태였고, 두툼한 자주색 스웨터 소매 아래로 나온 주름진 손이 소리 없이 허공을 누르는 걸 보면서 그게 그날 본 광경 중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악보를 훔쳐보게 되었다. 전차에서 내릴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상으로 나오자 해가 여태 지지 않아 날이 아직도 밝았다. 땅을 보고 걷고 있었는데 누가 앞을 가로막길래 놀라서 고개를 들었더니 친구의 애인이었다. 멀리서 나를 보고 놀래켜주려고 나무 뒤에 숨어 있었는데 내가 도통 앞을 쳐다볼 생각을 하지 않길래 김이 샜다고 하면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