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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we tried to be invisible, it only made us miserable,"


요새는 아침마다 팔자 좋게 친구의 차를 타고 출근한다. 나처럼 의대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 한 명이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일하는 건물이 의대 근처 전철역에서 멀어서 출근하다가 열불이 나버린 그 애가 얼마 전 드디어 중고차를 산 것. 이 주 전 쯤 늦잠을 자버려서 전철역까지 갈 시간이 없길래 나보다 살짝 늦게 출근하는 그 애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얻어탔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편하길래, 그 이후로는 별 일 없으면 그 애와 같이 출근한다. 저녁 샤워를 하는 친구는 항상 출근 이삼십 분 전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차에 시동을 걸고, 사거리에서 행인이나 다른 차가 갑자기 뛰어들면 욕도 격하게 해가며 7분 남짓 차를 몰다가 내가 일하는 건물 근처에 도착하면 나를 내려주고 유턴을 해서 자기 건물로 향한다. 전철로 출근하는 것보다 15분 정도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그렇게 남 덕택에 기동력 좋게 출근하는 것에 그새 익숙해져버려서,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야 했던 며칠 전에는 한참을 걸어가서 전철을 한 번 타고 났더니 출근하자마자 괜히 피곤해져서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지난 주에 어떤 계기로 문득 꾸준히 흑백사진을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는데, 이왕 생각난 것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핸드폰으로 찍은 흑백사진을 하루에 한 장씩 올리는 블로그를 따로 만들었다. 블로그 제목인 동작맹(motion blindness)은 지난 학기에 들은 '영화의 인지신경과학The Cognitive Neuroscience of Film'이라는 세미나 수업에서 처음 배운 희귀질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던 그 수업에서는 학생 열댓 명이 모여서 논문 한두 편과 당시 교수님이 쓰고 있던 책의 교정 전 원고에 대해 교수님의 지도 아래 토론을 해야했다. 그 전 해에 수강한 인지심리학Cognitive Psychology 수업에서 주워 들은 것들에 살을 보태 늘여 말하면 교수님이 눈에 띄게 신나하셨기 때문에 그 학기에 가장 마음 편히 들었던 수업인데, 아이들 대부분의 소극적 태도와 그로 인한 교수님의 잦은 개입 때문에 토론 속도가 생각보다 느렸던데다가 토론 내용 자체도 두 시간 반의 수업 시간을 고르게 즐거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아서 나는 자주 딴청을 피웠다. 그 와중 교수님이 동작맹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왠지 얼어붙었다.


시각피질 중 특정 영역(V5)에 손상을 입으면 뇌가 사물의 움직임을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으로 처리해주지 못 하기 때문에 생기는, 아주 드문 뇌질환이라고 했다. 그들이 느낄 움직임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자니 조금 힘들었다. 그건 내가 어릴 때 한 세기 전의 흑백사진을 보면서 그 시대에도 분명히 존재했을 다채로운 색들을 상상하려 애썼던 것 이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모든 색이 사라지고 명암만이 존재하는 사진, 그런 색의 부재 앞에서 그 시대에도 색이 존재했다고 믿으려 노력했던 유년시절의 나, 그와 비슷하게 어떤 질환에게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빼앗긴 채 움직임을 우두커니 상상하는 일, 그러나 결코 느낄 수 없는 동작들. 첫 흑백사진을 찍다가 그 일련의 생각들이 그렇게 역순으로 떠올랐다. 블로그 제목이 여태껏 보고 사례도 몇 없는 이상한 질병 이름이 되어버린 건 그 수 초의 기억 때문이었다고, 여기에 어줍잖게 변명한다.


6분만 있으면 썸머타임이 끝이 나서 한 시간을 벌게 된다. 앞으로 해는 한 시간 더 일찍 지겠지. 아주 어두울 때 귀가할 걸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별로다. 출근할 때처럼 친구 차를 타고 퇴근하면 좋겠지만, 친구는 나보다 늘 한 시간 더 일찍 퇴근한다. 일 끝나면 득달같이 운동하러 가는 애더러 나 퇴근할 때까지 멍청하게 기다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앞으로 귀가하는 길이 평소보다 어두울 걸 어쩔 수 없이 상상한다. 이렇게 된 이상 겨울이 빨리 오는 편이 낫다.



+ chromatics - the ri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