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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미분 가능하면 연속이라지만 영속은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나는 이 습득을 원한 적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받은 새 데빗카드를 찾으려고, 잡다한 서류를 모아둔 꾸러미를 열심히 뒤지다가 몇 년에 걸쳐 모은 카드와 편지 묶음을 찾았다. 생일 축하 카드가 제일 많았고 졸업 축하 카드, 친구들이 여행 가서 보내온 카드, 그동안 고마웠다는 카드, 그냥 네가 생각나서 썼다는 카드 등등 여러가지가 섞여 있었다. 그 묶음에는 내가 오며가며 사두고 미처 쓰지 못한 카드도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카드를 보자마자 문득 예전에 방을 같이 썼던 애 생각이 나서. 그래서 곧 있을 졸업도 축하할 겸 책상에 앉아 바로 카드를 썼다. 펜에서 잉크가 새어나와서 손이 더러워졌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과 졸업식을 지켜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도 옛날 이야기를 적었다. 그랬더니 자연스레 옛날 생각이 났다.


함께 살 때 우리는 각자 자질구레한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사건들로부터 숨고 싶어서 방문을 닫으면 그래도 방이라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의 방은 컸지만 숨을 곳은 딱히 없어서 우리는 항상 서로의 그런 일들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시할 수 없었다. 한 명이 울고 있으면 방에 불이 켜져있든 아니든 다른 한 명은 그 기류 변화를 반드시 알게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켜본다는 건 어쨌거나 곁에 있어준다는 거였고,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몇 달을 가늘고 길게 기억한다.


내 패인을 지금에야 천천히 분석해보면 진심의 영속성永續性을 맹신했다는 건데, 사실 이건 아주 예전부터 - 아주 처음부터 - 알고 있었고.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마음의 연속성과 영속성을 헷갈려하며 자꾸만 그래도, 그래도, 따위의 단어를 되뇌었던 나의 멍청함이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짜증나지만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너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 순간 나는 진심이었는데? 라고 네가 말해버리면 거기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물론 추하게 따져볼 구석은 있었다. 그러나 돌아올 대답은 뻔했다: 내 진심은 연속이랬지, 내가 언제 영속한댔어?


눈을 감는다. 너는 내 의심보다 훨씬 더 솔직했구나. 언제나 진심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어지러웠구나. 머리가 아프다. 적어도 그 지점의 네 진심은 연속적이어서 나는 참 어리게도, 그 연속이 멈추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속절없구나.


내가 뒤지고 있던 수십 수백 장의 카드 꾸러미 속에는 나는 곧 너를 만나, 라는 말이 적힌 카드도 있었다. 역시나 겨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렇게나 일반적인 활자들을 신빙성 있는 어떤 가설처럼 마음에 품고 다녔다. 그래서 네가 박제한 어느 근접한 순간 속에 내가 빠져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무너졌었다. 화내지 않았다. 슬퍼하지도 않았다. 너는 내 표정을 보지 않고도 자꾸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자꾸만 웃었다. 그 미안함도 물론 진심이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 뿐이라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괜찮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네가 네 진심을 부리는 방식을 배워가고 있다. 나 자신의 부피는 유지하면서 남은 얄팍하게 만들 줄을 안다. 괴롭다.



+ nils frahm - f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