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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내 손에 있는 모든 잔상처의 역사는 세상에서 너만 알아,


공연을 보는 내내 등이 더워서 기분이 좋았다.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이 어두웠고 날이 선선해져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걷다가 결국 버스를 한참 타고 번화가로 갔다. 시간이 애매했다. 밥집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어서 길에서 조금 헤매다 어떤 술집에 들어갔다. 가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식사를 하던 종업원이 주문을 받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 작년에 함께 봤던 영화 이야기를 했다. 네가 말했다. 그때 그 여자 남자친구가 여자더러 꼬마애와 자기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닦달했더니, 여자가 꼬마애를 고르잖아, 뜬금없이. 그러면 남자는 차에서 내리고. 그 부분이 난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말했다, 또는 말하고 싶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접했던 다르덴 영화 속의 여자는 자신이 평소 그렇게 증오하던 위장결혼 상대를 느닷없이 맨몸으로 껴안거든. 우리가 봤던 그 영화에서도 그랬고. 그 후에 본 다르덴 영화 속 사람들도 모두, 표면적으로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경로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특정한 타인에게 애정을 빚는데. 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해. 내가 제일 최근에 본 다르덴 영화 속 남자는, 어째서 우리 아들을 죽인 소년범에게 관심을 갖는 거냐고 추궁하는 전처에게 자기도 모르겠다고 대답해. 그 사람들은 그냥, 모르는 거야. 솟아나는 애정이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솟아나고 있는지 설명을 못하는 거야. 원래 그렇잖아, 애정 같은 거. 원래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난 그래서 좋다고. 다르덴 영화가. 나는 설명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인데, 영화 속 사람들은 괜찮아보여서. 흔들리는 롱테이크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 나한테는 그게 위안이어서.


너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응, 응, 말끝을 길게 빼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많이 걸었다. 밤에도 걷고 낮에도 걸었다. 난생 처음 가보는 곳이 여럿 있었다. 여태 나는 세상의 모든 골목들이 비슷한 모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소한 이것저것이 신기했다. 모퉁이마다 햇빛이 예쁘게 떨어졌다. 너랑 있으니까 왠지 눈이 아프고 팔이 저려. 그 문장에서 조금은 울 뻔 했다. 땅바닥이 사라진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그냥 묻지 않았다. 설명이 없어도 좋았다.



+ erik satie - gymnopédie 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