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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지난 주말에는 날씨가 봄날처럼 평화로워서 마음도 아늑할 / Peter Von Poehl - The Bell Tolls Five / 지난 주말에는 날씨가 봄날처럼 평화로워서 마음도 아늑할 수 있었다. 주말 직후에 있었던 퀴즈 공부를 했던 것 이외에는 소프트볼 연습도 하고 버블티도 마시고 여럿이서 숲공원으로 가 잔디밭에 앉아 있기도 하고 바빴어서 몇 주 동안 못 끝내고 있던 시집도 다 읽었다. 밤에는 친구들과 누군가의 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잼도 했다. 나는 반 년 동안 연주하지도 않은 카시오톤을 들고 갔는데 힙스터처럼 차려 입은 집주인과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와 악기를 한 번씩 만져보았다("잇츠 쏘 빈티지, 클로이!"). 누군가는 하모니카를 누군가들은 키보드를 또 다른 누군가들은 기타를. 어떤 한 아이는 이름도 모르겠는 악기를 가지고 놀았고 나머지들은 사방을 .. 더보기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 Gold Panda - Marriage /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노력에 대해 생각. 어디서 내가 글을 쓰며 살 팔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과학을 하는 어줍잖은 내 모습을 염려하고. 그 와중에,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자수성가는커녕 과학이 벅차 헐떡대는 나를 절대 이해 못 하시겠지(그간의 어록으로는 "집에 책상이 있고 심지어 자기 방이 있는데 돈 주고 독서실은 왜 끊나?"와 "학비를 대주는데 학점이 왜 만점이 아니지?" 등이 있다, 틀린 말씀이 아니어서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던 어린 나). 부모님과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런 얘기가 오갈 때마다 나는, 그러니까 그때 내가 피아노를 계속 했어야 한다며 웃었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엄마), 아니면 어차피 너는 .. 더보기
잠이 부족하면 나는 발성을 못 한다 다른 / Charlotte Gainsburg - Anna / 잠이 부족하면, 나는 발성을 못 한다. 다른 건 할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거나 타자를 치거나 음악을 듣거나 방을 치우거나 요리를 하거나. 그러나 허파에 공기를 넣었다 끌어내는 것, 그게 그렇게 힘들다. 경이롭다, 외부의 무언가로 내 공허를 채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니. 졸릴 때면 빈 속에 밥을 우겨넣는 것 또한 그래서 힘든 걸까, 엉터리로 추론하면서. 그러니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우리, 목소리 말고 다른 걸로 대화해... 체온이나 고요 혹은 응시만으로. 며칠 동안 절반 정도는 정신을 놓고 있었고, 주말은 대부분 혼자 보냈다. 끊을 것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사순절을 맞는다. 월요일 낮에는 낡은 문고리를 잡았다가 튀어나온 쇠조각 같은 것에.. 더보기
나는 사실 지금 조금 서럽다 세탁물을 건조기로 나는 사실 지금 조금 서럽다. 세탁물을 건조기로 옮기려고 지하실에 갔는데 아랫집 여자애가 건조기를 이미 돌려놔서, 웅웅대는 건조기 앞에 멍청하게 서 있다가 다시 올라왔다. 세탁물 건조 다 되면 베개에 따끈한 베갯잇 빨리 씌우고 냉큼 자고 나머지는 내일 정리하려고 했는데 나 이제 어떡하지. 졸리다. 머리가 아파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면이 부족하면 이상하게 몸이 무척 뜨겁다. 빨리 자라고 몸이 발열하며 협박하는 건지. 탈수를 마친 내 옷들은 탈수를 마친 모습 그대로 차갑게 아주 차갑게 세탁기 안에 들어있다. 그 안에 들어가서 파묻히면 몸이 식을까. 정확히 말해서 서러운 기분보다는 조금 더 격한 기분인데, 화난 건 또 아니고. 하지만 그 사이의 애매한 기분이라 냉장고에서 샐러리를 꺼내 물에 박.. 더보기
저녁을 먹으면서 3학년 시작부터 4학년이 되기 직전까지 저녁을 먹으면서 3학년 시작부터 4학년이 되기 직전까지, 대부분의 경우 핸드폰으로 찍었던 조악한 사진들을 보았다. 기억들을 추렸다. 시간 순서 랜덤이다. 생일 때 받은 꽃을 망가진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기억 고학년이 된 것을 기숙사가 알아서 뽐내주던 기억 미술관에서 Frank B와 사진 찍은 기억 상그리아 앞에 앉아 심각하게 문자 보내던 기억 한여름 밤에 모기에 뜯기며 전철 기다린 기억 먹으면 행복하던 기억 (그런데 나는 대두인가 어좁이인가 둘 다인가) 더위에 허덕이다 프로요 먹으며 황홀해하던 기억 이걸 내 방 벽에 박아 두고 싶었던 기억 (혹은 욕망) 생일인 척 케이크 장식을 요청한 기억 여름에 같이 살던 친구가 GRE 아침 응원 식사를 마련해줬던 기억 빠에야가 역시나 맛있었던 기억 비바람 치던 날 처.. 더보기
조금만 있으면 2월이고 작년 이맘때 휴교할 정도로 / My Bloody Valentine - Only Shallow / 조금만 있으면 2월이고. 작년 이맘때 휴교할 정도로 모든 곳이 꽁꽁 얼었던 것과는 달리 어제와 오늘은 최고기온이 섭씨 20도를 찍었다. 다들 좋아하면서도 당황했고. 나는 그보다 어제 숙면을 취해서 오늘 아침 기분이 최고였다. 유투브에서 고래 소리whale songs를 틀어두고 누웠더니 5분 만에 잠이 들었어, 점심을 먹다가 그 말을 했더니 현민이는 꺄윽꺄윽? 거리면서 돌고래 흉내를 냈고 나는 숨 넘어갈 것처럼 웃다가 돌고래 아니고 고래라니까! 라고 항변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숙제를 하다가 들어간 신경행동학Neuroethology 수업에서는 우연찮게 소리 방향 인지sound localization에 관한 강의를 들었고, 필기를 하던.. 더보기
마일드한 수면 장애를 겪는 것 같아서 침대에 / Thieves Like Us - Shyness / 마일드한 수면 장애를 겪는 것 같아서 침대에 앉아 오랜만에 카시오톤이나 뚱땅거릴까 잠시 고민하다가 작년 8월 이후로 건드리지도 않은 베일리스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마침 딱 한 잔만큼이 남아 있어서 우유에 타 마셨다. 우유는 사실 로레인껀데. 마시면서 박찬서 생각을 했다. 박찬서는 주량이 꽤 되기 때문이다. 박찬서는 나에게 취한 모습을 한 번밖에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그것도 내가 어색한 사람과 택시 뒷좌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을 때). 박찬서는 지난 가을 영화를 찍으며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박찬서는 지난 달 내가 자기 집에 놀러갈 때 어머니께 뭐 사다드리지,라고 물었더니 자기가 먹고 싶은 술 이름을 대며 그걸 사오면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더보기
후배가 성당으로 차를 몰며 오늘은 최고기온이 섭씨 / Todd Rundgren - A Dream Goes on Forever / 후배가 성당으로 차를 몰며 오늘은 최고기온이 섭씨 12도라고 해서 굉장히 신났었는데 그것도 잠깐이었고, 종일 추워서 안에서나 밖에서나 계속 떨었다. 바람만 안 불어도 나을 것 같은데. 여름보다는 그래도 겨울이 좋다고 내가 그랬지. 벗는 건 한계가 있어도 입는 건 다소 한계가 없는, 그런 당연한 이유도 있지만 일단 몸이 더워지고 목과 얼굴이 뜨거워지면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니까. 이제는 겨울이 나은 건지 확신이 안 서. 조금은 낮아지고 있나 생각해(이건 "나아지고"의 오타가 아니야). 이미 오래 전에 임계점을 지난 걸지도 모르지. 후배는 오늘 주기도문 외울 때 내 손을 잡고는 언니 손 참 따뜻하네요, 했어. 그런데 나는 사실 오.. 더보기
도착한 날 밤에는 비와 우박과 천둥과 번개 / Miami Horror - Sometimes / 도착한 날 밤에는 비와 우박과 천둥과 번개 같은 것들이 달려나왔고 급기야 토네이도 경보도 두 번 울렸다. 나는 시차 때문에 뜬눈으로 이불 아래서 뒤척이다가 두 번째 경보에 일어나 지하실로 내려갔고, 어둠 속에서 경보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토네이도가 집을 뚫고 전진하는 상상을 했다. 내 방으로 다시 올라갔을 때는 새벽 세 시였다. 다시 누웠는데, 무서웠다. 개강날에는 다들 날씨 얘기였다. Chelsea는 울었다고 했고 성우는 우박 소리를 들으며 그냥 잤다고 했다. 내가 이 학교에서 본 철학 교수 중 가장 예쁜 여교수가 환하게 웃으며 날씨 별로 나쁘지 않다고 말했고 다들 말이 없을 때 교수와 안면이 있는 친구는 내 옆에서 저 교수 위스콘신 출신이라며 키득거렸.. 더보기
머리를 생각보다 짧게 잘랐다 나쁘지 않다 목 / Keith Canisius - Far From / 머리를 생각보다 짧게 잘랐다. 나쁘지 않다. 목 주변이 추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리는 어차피 빨리 자란다. 언젠가는 앞머리를 다시 내고 뒷머리는 아주 짧게 커트해서 탈색을 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어울릴 건 둘째치고 호적이 파일까? 이렇게나 따뜻한 부산에서 사람들은 자기 몸집만한 패딩을 입고 다닌다. 다들 몸이 차가운 건지. 며칠 일찍 출국한 후배가 세인트루이스의 기온이 하루만에 화씨 55도에서 1도로 내려갔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어떤 옷을 입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언제 부산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이 있고 산이 있는 아름다운 나의 도시, 다음에 귀국할 때에는 또 다른 것들이 달라져 있겠지. 대학원은 꼭 물이 있는 .. 더보기
가고 싶기도 하고 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 Boards of Canada - Chromakey Dreamcoat / 가고 싶기도 하고, 가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아는 척보다 모르는 척이 더 어려울 텐데 용케 어려운 걸 택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랜 기간 체득한 거라서 어떻게 멈출 수도 없다. 내가 무슨 경로로든 발견당하고 문책당할 때까지 얼마나 오래 휴지(休止) 상태일 수 있는가 시험하는 것 이외에는 더 재미있을 것도 더 심심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 먼저 발성하고 싶지 않다. 외면해볼까. 나는 조건적 경멸 다음으로 책임전가에 능하다. 그 비린내 나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공간에서 나를 오려내고 싶다. 언제부터 모든 것이 이 정도로까지 그럭저럭이었나. 지난 여름부터였나? 아니면 지난 겨울? 그럭저럭하지 못한 기분들이 날숨을 몇.. 더보기
부산은 춥지가 않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최근 이사 / oOoOO - Burnout Eyess / 부산은 춥지가 않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최근 이사 온 학교 후배와 어젯밤 동생을 통해 통화하며 그래도 부산은 별로 안 춥지? 라고 물었을 때에는 전 좀 추운데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과 후배는 서면에 있었고, 나 또한 서면에 있다가 집 근처로 막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얻어 온 더위가 가시지 않아 목도리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춥지가 않다. 연신 춥다는 라디오의 말에 옷을 두껍게 입고 다니다 보면 문득 숨을 쉴 수가 없다. 목도리고 코트고 뭐고 전부 다 땅바닥에 팽개치고 싶어진다. 특히 자동차나 지하철에서는 호흡에 집중하고 싶어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한다. 소리에 머리가 아파와서 모든 것이 진공 상태였으면 한다. 그런.. 더보기
연초에 하는 문화생활 연말 결산 (2011) 이미 많은 기억을 기록에 의존하고 있지만 연말 결산은 한 적 없는 것 같아서 이 기회에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는, 미미하나 존재했던 2011년의 문화생활: 2011년의 공연들 2011년의 "제일 좋았던 유료" 공연: Tiësto 2011년의 "제일 좋았던 무료" 공연: Matt & Kim 2011년의 "의외의 성과" 공연: Neon Indian 2011년의 "외로웠던" 공연: Death Cab for Cutie 2011년의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 공연: Crystal Castles 2011년의 "유일한 연극" 공연: The Taming Shrew 2011년의 "유일한 뮤지컬" 공연: 빌리 엘리어트 2011년의 "제일 저렴했던 유료" 공연: Asobi Seksu + Neon Indian 2011년의 "제일.. 더보기
2차성징을 거칠 무렵 전후에 사귀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 The Weekend - Glass Table Girls /  2차성징을 거칠 무렵 전후에 사귀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이틀에 걸쳐 기억을 헤집는 과정을 잔뜩 거쳤다. 나는 굉장히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친구들은 그 사소성에 환호한다. 그러면 나는 왠지 고대에 갖가지 일화를 후대에 전승하던 음유시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5학년 때의 담임선생님 아들이 늘 쥐고 다니던 작은 토끼인형의 이름과 생김새, 당시 부모님의 지나친 개입으로 선생님의 지나친 개입을 피할 수 있었던 아이들의 이름, 옆 초등학교 아이들과 늘 싸우면서도(혹은 늘 싸웠기 때문에) 인기 많던 아이의 아이답지 않던 눈빛, 총각 선생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체육복을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던 여자애, 나와 친구가 교장선생님 은.. 더보기
적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산타가 있다고 믿었고 / Cocteau Twins - Frou-Frou Foxes in Midsummer Fires / 적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산타가 있다고 믿었고, 나와 동생의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부모인 엄마 아빠는 십여 년의 연극에 기꺼이 동참해주셨다. 다른 가족들의 사정을 내가 자세히 알 길은 없어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집의 역할놀이는 꽤 풍부하고 사실적(?)이었기에 부모님은 있지도 않은 산타에게 따뜻한 꿀물을 타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추운 날 먼 길 썰매 끌고 오면 추울 테니 다른 선물 운반하러 가기 전 몸 좀 녹이시라는 배려 섞인 논리였는데, 나와 동생 그리고 부모님 중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 나와 동생은(당시에는 같은 방에서 잤으니까) 자기 전 머리맡에 꿀물 한.. 더보기
원래부터 혈관이 얇다고 했다 간호사 언니는 팔뚝에 / M83 - We Own the Sky / 원래부터 혈관이 얇다고 했다. 간호사 언니는 팔뚝에 여러 번 주사를 찌르다 영 안 되겠다며 결국은 손목에 튀어나온 정맥에 주사를 꽂았다. 그러면서 아프면 말하세요, 라고 했는데 아프지 않는 순간이 없어서 '말할 만한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힘들었다. 바늘이 몸으로 들어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고 옆에서는 동생이 왠지 낄낄대며, 거기는 살갗이 얇아서 더 아플 텐데, 라고 했다. 수액실은 햇살로 가득 차 따뜻했다. 남향이었던지. 누워서 액체를 몸으로 받으며 전날 산 이이체 시집을 읽었다. 원래는 정좌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읽고 싶었는데 골골대며 식은땀 흘리는 상태로 읽게 되다니. 시집을 읽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다. 읽.. 더보기
방이 너무 덥다 난방이 지나치다 집에 오면 / Minus the Bear - Animal Backwards / 방이 너무 덥다. 난방이 지나치다. 집에 오면 작년에도 그랬듯 일단 뭐든 닥치는 대로 먹고 볼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딱히 그렇지도 않다. 하긴 아직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다. 비행시간도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 길었다. 한 집에서 나와 다른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스물여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지방에 살면 여행거리가 쓸데없이 길어진다. 몸 구석구석 여독이 끼어있다. 오늘은 외출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잠옷 차림이었다. 내일 낮에 온 가족이 이번 겨울 처음으로 다함께 식사하러 초량 쪽으로 나가는 걸 제외하면 아마도 월요일까지는 계속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겠다. 그 이후로는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화.. 더보기
네가 말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각자의 불행을 자랑처럼 / SBTRKT - Hold On / 네가 말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각자의 불행을 자랑처럼 나열하는데 익숙해졌어, 그중에서 누가 더 불행한가 경쟁하면서 뿌듯해하는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행이라 부르는 것들은 더는 불행이 아닌 걸까. 숨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잠이 적었고, 졸렸고, 그래서 많이 잤고, 아직도 졸리다. 나는 원래 잠이 많고, 잠을 제대로 못자면 내 페이스를 잃는다. 숨 돌릴 시간이 생겨서 드라마 하나를 보기 시작했는데, 극중에서 두 가지가 지켜보기 힘이 든다. 신하균이 온갖 불행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받아내는 것과, 전공의들이 잠이 모자라 끙끙대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후자가 보고 있기 더 힘들다. 보고 있는 내가 다 벅차다. 나는 잠이 부족하면 숨을 잘 못 쉰다. 심장도 .. 더보기
겨울이다 거짓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으려 드는 / Zazie - Rose / 겨울이다. 거짓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으려 드는 얼굴들을 치워버리고 싶다. 너의 표면을 벗기면 쓸데없는 자존감만 보게 될 것을 안다. 놀랍지 않다. 존중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존중하고 인정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다. 속으로 가시가 돋는다. 사실 이건 괜히 부려보는 어리광이다, 나만 손해보는 것 같으니까. 많이 먹고 많이 쉬었더니, 귀국하기 전 보름 정도가 매우 바쁠 것이다. 뻔하다. 지금 삶에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이 넘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그러쥘 부재가 없다. 네가 내 손이나 자주 잡았으면 좋겠다. 더보기
당신이 하는 말의 반만 맞고 반은 틀려요 / James Blake - Limit To Your Love / 당신이 하는 말의 반만 맞고 반은 틀려요.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상처를 확산해선 안 된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구걸하고 다닌다. 마음은 쪼그라들고, 살이 늘고 있다. 예전에는 천장이 온통 유리인 집에서 살고 싶었다. 누우면 끝도 없이 별이 보이던 강원도 밤하늘이 어떤 세뇌였던 것이다. 지금은 물이 그리워, 천장이 어항인 집에서 살고 싶기도 하다. 항구도시 출신인 것도 역시 세뇌였던지. 객관적으로 이곳은 물과 너무 멀다. 사실 모든 것과 멀다. 남은 건 나태와 초조함 그리고 기침 뿐이다. 성우와 노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건축과 과학, 각자의 노동. 본질이 비슷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의 뜻을 잊어가는 것 같아 자꾸만 상기하려 애쓴다. .. 더보기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창문이 덜컹거리는 것을 침대에 / Washed Out - You And I /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창문이 덜컹거리는 것을, 침대에 누워서 한참 보고 듣다가 일어났다. 침대가 너무 넓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기장판 때문에 나는 끝도 없이 누워있고만 싶었다. 누웠을 때, 내 시야에 제한적으로 걸쳐지는 것들이 좋다. 가령, 아래와 같다. 아침을 먹고 유자차를 마셨다. 집에 음식이 너무 많다. 학교에 갔더니 자동문이 있는 건물 로비는 낙엽으로 흥건했다(라는 용법이 옳지는 않지만 이외에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오전 수업 하나, 오후 수업 하나를 듣고 교수님을 만났다. 아들이 작년에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일하고 있다니, 우리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백발은 아닌데. 마주 앉아 오래 이야기를.. 더보기
주말이 지나면서 써머타임도 끝이 나서 이제는 매우 주말이 지나면서 써머타임도 끝이 나서 이제는 매우 빨리 어둑해진다. 은둔하기 좋은 달이다. 공백이 아까워서 밖으로 나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애인이 감정적으로 바람피는 거emotional cheating랑 육체적으로 바람피는 거physical cheating 중 뭐가 나아? 도서관에 앉아있다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 둘 다 싫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도 딱 하나 골라야 한다면 뭐가 차라리 낫겠어? 어렵네요, 그나마 후자가 조금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왜? 글쎄요, 몸과 몸이 닿는 것보단 마음과 마음이 닿는 게 더 비참할 것 같아서요. 여자들은 다 그러니? 모르죠, 다른 여자들도 그렇대요? 응, 그치만 남자는 반대인 것 같거든.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어요. 그렇겠.. 더보기
얼리고 싶은 시간들이 많이 생겼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 Phantogram - Nightlife / 얼리고 싶은 시간들이 많이 생겼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시금치가 시들해져 있길래, 대충 데치고 급하게 시금치무침을 만들었다.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심심한 나물반찬. 샐러드용 아기시금치라 얼마 만들지도 못했다. 냄비를 씻고 있는데, 자기 식사를 준비하던 로레인이 장조림을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다음에 달걀 사오면 만들게, 했다. 냉동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기어코 냉동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때, 그런 말을 들었다. 네가 끝도 없이 안이하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 알겠니, 이 어린 아이야(하지만 우린 나이가 같잖아, 라고 항변하지 못했다), 순진한 건지 어린 건지, 다들 너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구, 왜 그걸 모르니, 착하게만 생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