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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방이 너무 덥다 난방이 지나치다 집에 오면



/ Minus the Bear - Animal Backwards /


방이 너무 덥다. 난방이 지나치다. 집에 오면 작년에도 그랬듯 일단 뭐든 닥치는 대로 먹고 볼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딱히 그렇지도 않다. 하긴 아직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다. 비행시간도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 길었다. 한 집에서 나와 다른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스물여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지방에 살면 여행거리가 쓸데없이 길어진다. 몸 구석구석 여독이 끼어있다.

오늘은 외출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잠옷 차림이었다. 내일 낮에 온 가족이 이번 겨울 처음으로 다함께 식사하러 초량 쪽으로 나가는 걸 제외하면 아마도 월요일까지는 계속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겠다. 그 이후로는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화요일 점심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사람들과 어디론가 나다닐 예정이다. 익숙하지 않다. 귀국해서 이렇게 페이퍼 마무리나 할 거였다면 왜 시험기간 도중에 일찍 돌아왔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손톱을 물어뜯으며 페이퍼를 쓰고 있을 때 엄마가 아홉 가지 재료가 들어간 김밥을 만들어주시는 건 꽤 괜찮은 아늑함이 아닌가, 동거인들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고 있을 때 나 홀로 슬리퍼를 찍찍 끌고 부엌으로 가서 전자레인지에 얼린 밥과 남은 장조림을 돌려놓고 추운 내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과 씨름하다 전자레인지 조리가 끝났다는 신호음을 듣는 것 보다는... "아무래도 울적하지." 동생이 말했다.

귀국일에 이이체 시인의 첫 시집이 나왔다. 아주 예전부터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아서, 여름에 귀국했던 수화에게 시집을 사서 미국으로 돌아오면 나에게 부쳐줄 수 있냐고 부탁할 계획이었지만 수화의 가을 출국일이 다 되도록 시집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러다가 내가 귀국해야 출간되는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마치 내 생각이 어떤 나쁜 씨앗이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해를 넘기진 않았네. 처음으로 제대로 외출하는 날에 혼자 서점 가면 되겠다. 즐겁다. 수화가 부탁한 시집들도 있다.

그 사실을 제외한다면 아직 이렇다할 재미는 없다. 신나는 일도 없다. 따분하다. 어릴 때의 나는 내가 자주 조증을 겪는다는 상상에 염려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찾기 힘들지 않나. 네가 핵심을 가리고 웃기만 하던 걸 기억하면 나는 아직도 다 못 삼킨 화에 목구멍이 뜨겁다. 오른손으로 목의 절반을 감아본 적이 있다. 얼른 마지막 페이퍼나 마감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