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간의 돛단배

원래부터 혈관이 얇다고 했다 간호사 언니는 팔뚝에



/ M83 - We Own the Sky /


원래부터 혈관이 얇다고 했다. 간호사 언니는 팔뚝에 여러 번 주사를 찌르다 영 안 되겠다며 결국은 손목에 튀어나온 정맥에 주사를 꽂았다. 그러면서 아프면 말하세요, 라고 했는데 아프지 않는 순간이 없어서 '말할 만한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힘들었다. 바늘이 몸으로 들어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고 옆에서는 동생이 왠지 낄낄대며, 거기는 살갗이 얇아서 더 아플 텐데, 라고 했다. 수액실은 햇살로 가득 차 따뜻했다. 남향이었던지. 누워서 액체를 몸으로 받으며 전날 산 이이체 시집을 읽었다. 원래는 정좌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읽고 싶었는데 골골대며 식은땀 흘리는 상태로 읽게 되다니. 시집을 읽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다. 읽다가 잠이 들었다. 푹 자다가 링거액이 끝날 때쯤 일어났더니 미열도 근육통도 사라져있었다. 삼촌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왔다.

사실 심한 몸살도 아니라 며칠 동안 집에서 약 먹고 잠만 자면서 쉬면 낫겠지만 크리스마스 전후로 가족들과 제주도로 가기로 되어 있어서 속성으로 나아야 한다. 작년에도 동생이 많이 아픈 바람에 가족여행이 취소되어서 가족들이(특히 엄마가) 예민해져 있다. 그 성원에 힘입어 나는 어제 열 시간을 자는 쾌거를 이뤄냈다. 너무 많이 자서 허리가 아프다.

어제 늦은 점심으로 죽을 먹고 쉬고 있는데 철현이가 집에 전화를 걸어와 속상한 목소리로 외박이 잘렸다고 했다. 나도 속상했다. 하지만 어차피 부산에 들어와있는 애들도 몇 없고 나도 아파서 못 나가게 되었으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다음 달에 보자고 말해주었다. 철현이를 못 본지 일 년 반이 훨씬 넘었다. 작년 봄에 애들과 섞여서 뉴욕에서 만난 것이 마지막. 뉴욕에 일주일 정도 묵을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던 나는 하루만 맨해튼에 있는 동균이 집에서 신세를 지고 로레인이 사는 롱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갔는데, 마지막으로 본 철현이 모습이 기억이 안 난다. 식당이었는지 기차역이었는지. 철현이는 계속 동균이 집에 묵었던 건지. 내년 철현이 생일에는 다른 친구들과 다 함께 철현이를 볼 수 있도록.

페이퍼를 다 끝낸 이후로는 책도 많이 읽고 있고, 
외출이 적으니 가족들과 시간도 많이 보낸다. 음악도 많이 듣는다. 느긋하다. 캠프에서의 일도 과외도 하지 않는다. 핸드폰이 없으니 연락도 꼭 필요한 연락만 하게 되고. 눈이 오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제주도는 눈이 많이 온다고 하니까. 제주도에서 갈 맛집들을 찾고 있다. 서울에서 사람 만날 계획을 얼른 세워야 한다. 찬서를 보는 것과 동문회에 가는 것 이외에는 계획이 없다. 오늘은 영화를 몇 편 봐야겠다. 한량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