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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My objections suddenly seem so transparent here in the daylight," -- From Smilla's Sense of Snow by Peter Høeg from Ida (2013; dir. Pawel Pawlikowski) 전깃세가 많이 나왔다. 여름의 고지서는 어쩔 수 없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걷는 것이 너무 더워 의아해하며 달력을 보니 한여름이다. 두 달 정도를 뭉텅 잃어버린 것 같다. 비어있는 기분이냐니, 그건 또 무슨 질문이지. 내가 어떤 문장으로 대답하길 바라길래. 나쁘네, 하니 수긍한다. 소용없지만 자꾸만 생각한다 생각해본다 무엇이 우리를 흔들었는지 흔들고야 말았는지. 난 재촉한 적도 없는데. 재촉하지 않아서였을까. 재촉했어도 똑같았겠지. 일 년 중 낮이 제일 길다는 날, 해뜨는 것을 바라보며 기절하듯 잠에 빠지면서 나는 하필 그런 것이 궁금했다. 앞으로 낮이 점.. 더보기
"Our despair was temporary but not less painful." -- From Many in the Darkness by Thomas McGrath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주 전, 그래도 요새는 건강이 호전되는 것 같지 않냐며 가족들이 기뻐할 때 아빠는 이건 표면적으로만 좋아지는 거라고 결국에는 나빠지게 되어 있다고, 나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근본적인 것을 해결할 수 없으니 답이 없다는 거다." 언뜻 읽으면 비관과도 같은 그것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최근 혼자 도달한 결론: 잘 지내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잘 살지 못하고 있다. 끔찍한 일. 나의 외부를 지탱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줄이야. 표면장력은 과연 힘이 센 것이었구나. 잘 지탱하다보면 잘 지낼 수 있게 되고, 잘 지내다보면 잘 살 수 있게 될 줄 알았.. 더보기
"Impossible, I realize, to enter another's solitude." -- From The Invention of Solitude by Paul Auster 아이작이 죽었다. 룸메이트가 마트에서 사온 실란트로였는데, 룸메이트가 물을 너무 많이 주었는지 어쨌는지 줄기가 노랗게 시들시들해지더니 석 달을 못 넘기고 죽어버렸다. 어쩔 수 없군, 하며 룸메이트는 손바닥만한 실란트로 화분을 그대로 들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화분이 한순간에 쓰레기처럼 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내 난초도 꽃을 다 떨구었다. 마지막 꽃까지 떨어지고 나자 식탁 위에 자주색 꽃잎이 그림자처럼 쌓였다. 작년 연말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랩 동료가 병원 선물점에서 사다준 난초인데, 꽃이 다 지거들랑 줄기 가장 아랫마디 바로 위를 자른 다음 서늘한 곳에 두고 매주 물 주듯 똑같이 물을 주라고 친구가 일러준 게 기.. 더보기
"But it is by blind chance only that we escape tragedy." -- From Pantoum of the Great Depression by Donald Justice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주만큼 팽창한 찰나를 보았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것들은 영원히 팽창할 것이다. -- 라고, 저렇게 쓴 노트를 이메일 draft함에서 찾았다. 마지막 수정 날짜는 4월 3일, 불과 열흘 정도 이전에 쓴 문장이지만 대체 어떤 맥락에서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단어의 조합들은 마치 실수로 잘못 찍은 사진 같다. 여튼 당장은 기억나지 않는 내 마음이지만, 나중에라도 기억이 날까봐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지울 걸 그랬나. 그렇지 않아도 내 손엔 조각난 글들이 잔뜩인데. 쓰다만 것들이 너무 많다. 몇 주 째 많은 시간을 앉아서 읽고 쓴다. 모니터를 멍하게.. 더보기
"We loved the way an ordinary word collapsed its meaning into pure sound;" -- From "On Aesthetics" in On Looking: Essays by Lia Purpura Last Thursday, while waiting in line like forever at a Chick-fil-A drive-thru, I opened my iPhone note app and wrote: As soon as I got into the car it started to pour. I didn't know what to do, so I texted it's so pouring, waited, or more like hesitated, and then reluctantly started the car. As I was exiting the campus an intense bolt .. 더보기
"I have decade-old one-line emails from friends still saved on my hard drive." -- From The Lost Art of the Condolence Letter by Saul Austerlitz 주말의 끝에서는 모닥불 앞에 앉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봤다. 하늘만 봤다. 온갖 색이 천천히 그러나 끊이지 않고 번졌다. 밤 한 시간을 내어주고 낮 한 시간을 얻은 첫날이었다. 이것 좀 보렴, 이러니 시간을 잃어도 마음 상할 것 단 하나 없구나. 우리는 화로에 장작을 꾸역꾸역 먹여가며 불을 쬐었다. 구운 감자와 옥수수, 새우를 먹고 나무 타는 냄새를 실컷 맡았다. 가디건에 내려 앉은 재를 털어내고 일찍 귀가했다. 아파트 임대 보험을 일 년 연장했다는 서류를 아파트 오피스에 보내면서 내가 벌써 이만큼 살았구나 생각했다. 일을 망치고 황망함에 손톱을 뜯었다. 곧 남의 더욱 엉.. 더보기
"What etiquette holds us back / from more intimate speech, / especially now, at the end of the world?" -- From Vestibule by Chase Twichell 자정 가까운 시간에 퇴근한 어느 날 머리에 손전등을 단 어떤 여자가 마이클, 마이클, 똑같은 이름을 작지 않은 목소리로 부르며 우리 집 앞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끄덕 인사하고는 계속해서 마이클을 찾는 것이었다. 다음 날 건물 밖 계단 앞에는 고양이를 찾고 있다는, 손으로 또박또박 쓴 공고가 붙어 있었다. . 고양이 이름이 마이클이라니 그건 조금 별로군, 너무 사람 같잖아. 룸메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며칠 동안 인사처럼 그 공고를 쳐다보며 출퇴근을 했는데 오늘 보니 그 공고가 없어져있었다. 그 여자는 마이클을 찾았을까. 포기했을까. 아마도 찾았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며칠 동안 비도 많이 왔는데. 쏟아지는 비.. 더보기
"I have no skin (except for caresses)." -- From A Lover's Discourse by Roland Barthes 일기를 쓰거나 랩 노트를 작성하거나 파일명을 입력할 때, 2015년을 실수로라도 2014년이라고 적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걸 놀라워하면서 한 달을 훌쩍 보내버렸다. 원래 한 해의 첫 몇 주 동안은 곧잘 삐끗하며 연도를 틀리곤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올해의 나는 올해가 올해라는 것을 너무 자각하고 있다. 요새의 나는 달력을 거울보다도 자주 보기 때문이다. 나는 온전히 여기에 있는데 여기 앞과 뒤의 날짜들이 마치 나인 것처럼 굴고 있다. 아마도 입증하고 싶어한다. 어딘가로 너무 많이 나다닌다. 내내 빼곡한 허공을 헤엄치는 기분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며칠 사이에 페이스북 친구가 쉰 명 정도 더 생겼다. 나는 이.. 더보기
2014 올해도 서정에 사장되고 싶었다. 그리고 서정은 여전히 내가 기대하지 않을 때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를 묻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좋은 일도 했고 나쁜 짓도 했다. 좋은 일은 '일' 같고 나쁜 짓은 '짓' 같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원대한 일도 원대한 짓도 하진 않았다. 나는 그 정도였다. 부산, 로체스터(미네소타), 애틀란타, 샌디에고, 팜스프링, 마이애미, 올랜도, 샬롯, 뉴욕,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그리고 잭슨빌에 있었다. 내가 하루라도 잤던 모든 곳을 각자 사랑한다. 버릇이다. 살아본 여름 중 제일 길었다. 잊을만 하면 다시 더워지는 식이었다. 여름에는 많이 울었다. 장마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름의 끝에서는 여전히 Magnet의 Last Day of Summ.. 더보기
"my hands are porous things filled up by anything," 알람을 맞춰놓았던 시간보다 세 시간 일찍 잠에서 깼다. 그냥 깼다. 활짝 열린 기분으로 깨어버려서 다시 잘 수가 없었다.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어젯밤에는 정말 피곤했지만. 이상하군. 조금 울고 싶었다. 울지 않았다. 한 시간을 그냥 누워 있다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슬리퍼를 신어도 발목이 시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 부쩍 추워졌다. 주말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질 거라고 그러지만. 여튼 이제야 정말 가을 같다. 어제 처음으로 차에 히터를 틀었다. 집에는 히터를 들지 않았다. 계란에 우유를 부어 익혀서 석류가 들어있는 요거트와 같이 먹었다. 오렌지 향이 나는 커피콩을 갈았다. 커피물이 끓는 것을 지켜보았다. 혼자서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할 때 특유의 공기가 있다. 영화 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건 내가 자주.. 더보기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다(신형철),"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올해 1월 31일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나는 서서히 정전이 되어간다"였고, 임시로 저장되어있던 일기 세 개를 지웠다. 다시 읽어보아도 더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고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을 상관없어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다. 한 번만 안아도 될 것을 두 번 안아 후회한다. 내가 그런 삶을 골랐다. 나의 불행이 온전히 나의 몫이라 불행하다. 정전을 상상하기 직전에 "이 정도면 이 불행은 어떤 불행도 아니게 된다"라고 쓰던 내가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던 건지 어떤 정적을 이기려 애썼던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 갑작스레 불행하다. 아픈 목과 어깨를 외롭게 주무르며 이슬 내린 학교 주차장을 걷던 새벽 그렇게 생각했다. 심포지엄 참석차 출장을 나갔다가 감기를 달고 돌아와 주말 내내 기침을 하고 코를 훌쩍이며 밀린 일을 .. 더보기
"air is your permanent struggle to breath," 아무래도 내가 나를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라고 8월의 끝에 가까스로 한 문장을 쓴 흔적이 여태 남아 있고, 그냥 두기로 한다. 어떤 맥락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이 문장은 내가 제일 자주 남용하는 문장이다). 알록달록하게 어두컴컴한 친구 집 거실에 앉아 친구의 바텐더 남자친구가 만들어주는 술을 마시며 9월을 맞았다. 9월로 넘어왔음을 뒤늦게 깨닫고 생각했다. 달력이란 뭘까. 어제 다음은 오늘이고 오늘 다음은 내일일 뿐인데 순환하는 숫자를 달아놓는 것만으로도 나란함에 끊어짐이 생긴다. 어쩔 수 없이 넘게 되는 문턱과도 같고, 나는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는 것만 같다. 비정한 일이다. 긴 주말이 끝난 이후로 이상하게도 밤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해서 며칠째 새벽녘에 .. 더보기
but it's okay darling, i'm mostly benign, 단어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 잔뜩이다. 생각의 숫자는 많아지지만 각각의 길이는 짧아지는 식이다. 거의 단위에 가깝다. 어느 정도 길어져서 단어가 되는 생각들은 이미 거듭되고도 거듭되는 바람에 가까스로 임계점을 지나친 생각들이다. 가령: 나는 어떤 독毒일까. 이것은 나를 죽일까.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릴 수도 있지. 스트레스 상황에서 세포는 단백질과 핵산을 똘똘 뭉쳐 과립을 만든다. 아마도 방어 및 보호기작의 일종일 것이다. 그걸 현미경으로 쫓아다니면서 예쁜 사진을 찍는 것이 요새 내 일이다. 형광이 바래지 않기 위해 조명을 최소화하여 어두운 방 안에서 그것들은 마치 별처럼 빛난다. 마치 안심시키는 것처럼 괜찮아요 마음 놓아요 나는 대체로 무해해요 지난 주에는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Boyhood를 봤고.. 더보기
"this is fact not fiction for the first time in years," 애틀란타에 다녀왔다. 비행기 경유가 잦은 곳이고 올 3월에 차를 몰고 이사를 할 때 하루 머물기도 했지만 도심 안을 본격적으로 돌아다녀본 건 처음이었다. 옷을 옛날 신사숙녀처럼 입은 사람이 많았다. 복숭아를 먹어야겠다 생각만 하고 먹진 않았다. 이상한 시간에 잠들고 이상한 시간에 일어났다. 나는 대체로 모든 공원을 좋아한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수족관이었더라면 난 그 크고 푸른 유리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바쁘지 않은 주가 없듯 지난 주도 참 바빠서, 애틀란타로 가려고 한 시간 정도 일찍 퇴근한 금요일 빼고는 매일 매우 늦게 퇴근했다. 와중에 하루는 일하다가 전해들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 내가 지난 몇 개월간 염려했던 모든 것들의 단면을 봐버린 기분이 들어서 쓸데없이 펑펑 울다 잠이 들.. 더보기
가끔 암실 같이 좁고 희미한 기분이 든다, from Dans la maison (2012; dir. François Ozon) For some fortunate individuals, "imagination brings bliss at no cost" like the lyrics to Nujabes' beloved song "Luv (sic) Pt. 2" says but for those who are less fortunate, including myself, it just doesn't act that way. Even if it does, that so-called bliss rarely happens and lasts only temporarily. It quickly vanishes like a courtesy smile and even.. 더보기
"i close my eyes and spiral away from all i've done and seen," 오늘 점심 즈음 잠에서 깨 침대에 누워서 오늘이 일요일인가, 혼란해했는데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니 오늘 말고 내일 바다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그렇다면 오늘은 과연 토요일이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종일 일이 너무 많아 총체적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늦은 낮 일을 대충 다 끝내고 한숨 쉬면서 커피 텀블러를 물에 씻고는 물기를 닦은 젖은 페이퍼 타올 대신 깨끗해진 텀블러를 휴지통에 던져넣음으로써 정신없음의 정점을 찍고 말았다. 몸을 숙이고 휴지통에 팔을 집어 넣어 텀블러를 건져내면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퇴근하고 나서는 학교 이벤트의 일환으로 사람들과 함께 강에서 두 시간 정도 보트를 탔다. 그러면 기분이 느슨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보트에 타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갈증이 치밀어서 물 두 병을 연달아 마셨고 .. 더보기
"because you think if you're fearless even death would be impressed," 여름은 좋은 거구나. 내가 여태 살면서 살았던 곳 중 제일 더운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여름은 좋은 계절이라고 읊어본다. 절대 싫기만 한 계절일 줄 알았다. 더워하느니 차라리 추워하는 것이 더 낫다는 지론을 지탱하며 지내온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행복해보여서인지 내가 행복해서인지. 바다는 항상 바로 여기에 있다. 상어가 해변가로 몰려올 수 있는 해질 무렵 및 새벽만 빼고는 언제든 물장구를 칠 수 있다. 날이 더우니 사람들은 툭하면 모여 논다. 모래사장에는 음악을 틀어두고 건강한 얼굴로 온갖 운동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과 해변 의자를 가져다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남부 도시답게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그들 뒤로는 거북이 알 둥지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있다. 그게 즐거운 건 맞다. 하지만 나.. 더보기
"our heads were reeling with the glitter of possibilities, contingencies," 박사 1년차가 끝났다. 어제는 내가 공식적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일 년이었다. 짧은 방학 중이다,만 말만 방학이라 수업은 없어도 실험실은 나간다,만 휴가도 조금씩 내고 마음도 조금은 수월하다. 나태한 걸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나에 대한 나의 관대함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이 일련의 의심은 어느 정도 비밀이었는데 여기에 써버렸다). 한여름으로 치닫기 직전이니 이 수준의 느슨함은 조금은 괜찮지 않나 생각하다가도 뉴욕에 다녀오면 꼼짝도 못하게 박사 2년차가 될텐데 지난 일 년간 나는 뭘 배웠지, 무슨 데이터를 뽑았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괴감도 들고 부끄럽기도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냥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치기로 했다. 다만, 작년에 나와 같이 면접을 봤다가 불합격했던 학생이 다시 .. 더보기
지나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지나는 것에 지나치지 않는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라면 생각대로라도 되어야 할텐데 대부분의 경우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내 마음은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관둔다손 치더라도 내 생각에 틀림이 있다고 해석이 되어버리면 견딜 수 없다. 재차 곤란하다. 오늘 신경질환 세미나 주제는 만성통증chronic pain이었는데 평소 잘 모르던 분야라서, 오늘 하루 종일 머리가 먹먹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여 재미있게 들었다. 고통suffering 혹은 "사회적 통증social pain"을 신체적 통증physical pain과 구분하는 지점이 흥미로웠는데 전자와 후자의 경우 모두 비슷한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연구 보고가 있었다고 했다. 통증은 어쨌거나 통증인 것이다. 인풋이 없어도 아플 수 있고(만성통증), 없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아플.. 더보기
"it's hard to forget what we haven't done yet," 얼마 전 집 근처 영화관에서 Jodorowsky's Dune(조도로프스키의 듄)의 마지막 상영을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조도로프스키가 센 남미 억양으로 말하는 "인생의 목표란 뭘까, 네 자신의 영혼을 만드는 일이겠다What is the goal in life? It's to create yourself a soul."와 같은 문장들로 시작했는데, 인터뷰에서 조도로프스키는 방대한 길이의 소설 Dune듄을 영화화한다는 건 어떤 작업이었는지에 대해 열띤 설명을 했다. 소설은 텍스트 즉 다분히 청각적auditory이고 영화는 시각적visual이다, 나는 원작자가 소설에 부려놓은 청각적인 활자들을 내 상상으로 빚어 시각적인 요소들로 재탄생시켜야 했다, 따라서 활자를 영상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감각을 전환하는 일이었.. 더보기
그것은 일종의 간격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이것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로드트립을 시작한 날 새벽에는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고, 고속도로는 제설차가 새벽 내내 열심히 밀어준 덕분에 나름 깨끗한 편이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완벽하게 설국이었다. 눈길 운전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고, 와이퍼고 뭐고 차의 온갖 부분이 얼어있어서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운전하다가 눈을 두른 사방이 예뻤던 덕에 이내 긴장을 풀고 라디오를 들으며 기분좋게 차를 몰았다. 내가 아닌 다른 차들은 아주 드물게 보였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온 세상이 내것 같았다. '순전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순전함'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순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와서 선글라스를 꼈다. 미네소타와 아이오와 경계선까지의 길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래서 너무 행복했는데, 주유를 하려고 아이.. 더보기
내가 원하는 답은 종종 단 하나도 없었다, 많은 시간은 지나고 보면 항상 짧고 매우 예전 같다. 분리라는 건 그렇다. 며칠에 걸친 운전 끝에 미네소타에서 플로리다로 사고 없이 내려오고 이후 곧 이사를 했다. 나는 빈 집에 몇 가지 가구를 들이고, 부엌을 식기구와 조리도구로 채우고, 침구류를 사러 돌아다녔다. 나와 함께 한 달 정도 머무실 요량으로 한국에서 오신 엄마가 많이 도와주신 덕에 집 정리는 예상보다 수월했다. 나는 정식으로 합류한 실험실에서의 일을 계속 진행하면서 기말고사 하나로 겨울학기를 어렵지 않게 마무리하고, 예년보다 빨랐던 박사자격필기시험을 치루어내고, 여차저차 통과했다. 고작 며칠의 텀을 두고 봄학기가 시작되었고,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했고, 엄마가 귀국하시기 직전의 주말에 엄마를 모시고 올랜도와 세인트 어거스틴에 다녀왔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