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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what is this new body, what am i supposed to feel,"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남자인 소설가가 여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When people are contented and have nothing to do, emotion spreads like a malignant tumor."


"It is impossible for ordinary people to tell a thoroughgoing lie. Deception always gives itself away. ... Pure truth, on the other hand, is thoroughly destructive and leads nowhere."


"He went through life as if it were a preliminary course in which one learns a lesson and stores up experience."


와 같은 문장이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힌다. 번역된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는다. 작년 봄방학 때 읽은 아멜리 노통브Amélie NothombFear and Trembling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원문은 또 어떤 느낌일까. 번역문은 읽을 때마다, 나와 원래 텍스트 사이의 누군가를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상상도 나름 재미있다.



봄 겉옷을 꺼내 입을 정도로 따뜻해져서 이렇게 겨울이 끝나나보다, 생각했는데 기온이 낙하하더니 목요일에는 눈폭풍이 몰려와서 세 시간 정도 일찍 퇴근했다. 허겁지겁 플랫폼에 들어서자마자 날씨 때문에 전차가 늦어진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전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왔더니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없어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어서 집이 있는 북쪽으로 조심조심 걸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발이 눈 속으로 푹푹 꺼져서 낑낑대는 와중 내 뒤에 있던 사람은 성큼성큼 걸어서 나를 지나쳐갔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걸어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뒤돌아 나를 힐끔 보고는 웃으며 익숙해서요, 했다. 길의 끄트머리에서는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자동차 행렬이 사라진 거리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에는 차도를 정리하기 위해 인도 쪽으로 무작정 밀쳐진 눈더미 때문에 전차역까지 걸어가는데 애를 먹었다. 아예 장화를 신고 나와서 첨벙첨벙 걸어서 출근했고, 건물 안에 들어서서는 가방에 넣어간 탐스로 갈아신었다. 박사님은 내 신발을 보시고는 밖에 길이 눈으로 엉망인데 어떻게 그걸 신고 출근했니? 하셨다. 퇴근하고 친구와 오랜만에 장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친구 차가 눈에 그야말로 파묻혀 있어서 친구는 낑낑대며 몇십 분 동안 얼음을 긁어 차를 발굴해냈다. 주말에도 쌓인 눈은 녹을 생각을 안 했지만 날씨는 참 예뻐서, 오후에 룸메이트와 공원으로 조깅을 하러 갔다. 분홍색과 노란색이 섞인 추운 하늘을 배경으로 수십 마리의 새들이 날아오르는게 보기 좋았다. 저녁으로는 전날 사온 두부를 넣어 칼칼한 된장찌개를 끓여서 밥을 말아 먹었다. 이번 주 내내 수면 패턴이 엉망이었는데 오랜만에 달려서인지 밤에 잠이 잘 왔다.


토요일 밤에 잠들기 전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DVD 중 다르덴Dardenne 형제의 영화 La promesse(프로메제)를 봤다. 스크린에서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거의 20년 전의 제레미 레니에가 너무 앳되어 보였다. 영화의 마지막 롱 테이크는 아슬아슬한게 참 아름다웠다. 영화를 다 보고 DVD에 수록되어 있던 다르덴 형제의 인터뷰도 보았다. 예전부터 다큐멘터리와 다른 영화도 찍었던 그들은 La promesse를 그들의 진정한 첫 영화로 여긴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우리가 순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삶의 균열들을 우리 모르게 한데 모아두었다가 시간이 흘러 우리가 이윽고 현재에 도달한 후 과거의 어떤 순간들이 지금의 우리를 이룩하게 되었는지 혼란스러워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그간 수집해왔던 예전 균열과 균열들을 아무 음악 없이 상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했다. 영화 속 그들에게 그 "누군가"는 다르덴 형제이지 않을까 상상한다. 우리를 결국 무너뜨리는 생활의 갈라짐을 부분 부분 결대로 스크린에 실어놓은 걸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여태 본 다르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연민의 가장자리에서 종종 위태로워하고, 그래서 서로를 더욱 간절하게 끌어안는다. 카메라는 그 체온을 집요하게 쫓는다. 목이 메인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결말을 함께 봤다.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내가 아닌 남을 보면 마치 소설책의 요약본을 훑어보듯 모든 끝이 빤하게 읽혔다. 결말이 있는 이야기는 참을 수 없었다. 몰입하기도 전에 자꾸만 결말만을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나는 경계에 서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부러지고 부서질 것이 무서워 단 한 번도 연민을 연민 이상으로 만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내가 이러다가 생각 때문에 망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전에 너는 웃으며, 너는 술로도 풀어지지 않아, 했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만 한다.



+ teen daze - new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