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간의 돛단배

"we're in a natural spring, with this gentle sting between us,"


지난 여름 의대 전철역에서 자꾸만 마주치던 친구가 있었다. 친분이 두터운 친구는 아니지만 같이 수업 들은 적도 있고 해서 만나면 서로에게 안부 정도 묻는 친구인데 그 여름에는 하도 자주 마주쳐서, 이것도 인연이니 함께 날을 잡아 밥을 먹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퇴근하고 의대 근처 술집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요즘 뭐하냐고 묻는 나에게 걔는,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아서 낮에는 의대에서 일하고 밤에는 의대 원서를 준비한다고 했다. 외국인으로 여기 의대 문을 뚫기가 힘들 법도 한데 웃으면서 준비가 잘 되어간다고 했다. 평소 지켜본 바에 의하면 워낙 열심히 살던 애라 그럴 만도 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학에 온 이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놀라서 물었다. 나도 집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긴 한데, 너 집에 가고 싶지 않아? 가끔, 그치만 별로 그런 마음은 안 생겨, 어차피 거기에서 살 마음도 없고.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자기는 정말 의사가 되고 싶지만 자기 나라처럼 의사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는 곳에서 기계처럼 환자를 대하며 부품처럼 소모되고 싶지 않다고. 게다가 자기처럼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자기 나라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용인해주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좀 걱정이긴 해, 우리 부모님 아직 모르셔서, 내가 남자 좋아하는 거. 걔는 히히 웃으며 튀김을 집어 먹었지만 나는 걔가 지난 몇 년간 숨죽이고 몸부림쳐왔을 간절함의 부피에 눌려서 더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클로이,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네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좋아, 네 안에서 다른 가치들이 아름답게 공존하길 바랄게전차에서 내리기 전 그 애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실수로 이상한 정거장에 내려 급히 큰 길 쪽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고마워, 하지만 내 믿음은 어디서부턴가 잘못된 것 같아, 찢어질 것 같은 나의 순간 또한 내가 모르는 형태의 은총임을 기억하는 일이 나는 제일 어렵고 힘들어.



대학원 두 군데 사이에서 며칠 고민하다가 결국 한 군데에 확답을 주고, 공문을 받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멍하게 있다가 공항에 가기 몇 시간 전이 되어서야 빈둥빈둥 짐을 싸서 보스턴으로 갔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St. Patrick's Day에 휴가를 맞춘 덕에 온 거리에 초록색 취기가 넘치는 걸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졸업 이후 딱 두 번 있었던 기모임을 제외하면 한 자리에서 동기들을 그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다들 너무 똑똑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거나,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봄방학이라 텅 빈 친구 기숙사 거실에 모여 앉아 막걸리와 매화수와 와인을 마셨고 시내에 나가서 가재와 굴과 새우와 조개도 먹었다. 너무 잘 얻어먹고 분에 넘치게 대접을 받아 황송하고 고마웠다.


떠나는 날에는 눈이 엄청나게 쌓여서 비행기가 연착되었고, 미네소타에서 갈아타야했던 비행기 이륙 시간을 넘겨 착륙하는 바람에 살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놓쳐봤다. 다행히도 몇 시간 후의 비행기를 잡아탈 수 있었다. 겨우 하루 그리고 하루 절반 휴가를 냈는데도 돌아와보니 할 일이 산더미였다. 곧 귀국한다고 생각하자, 하고 있는 일을 얼른 (그리고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과 그리고 최대한 알차고 빠듯하게 놀고 싶은 마음이 팽팽하게 맞선다. 가기로 한 대학원이 예상보다 너무 일찍 시작하는 바람에 한국에서 놀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다. 엉뚱한 곳에서 조급한 기분이 든다. 벌써부터 한국에서 어떻게 뭘 하고 놀아야 잘 놀았다는 소리를 들을까, 궁리한다. 내일 잊지 말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살 것.



+ rhye - o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