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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you play my only tune, like you always do, and it keeps my feet upon the ground,"


퇴근 전차에서 내 옆에 앉은 한 노인은 검은색 노트북 가방 위에 낡은 피아노 악보를 펴두고 손가락으로 가상의 피아노 건반 누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퇴근이 빨라 기분이 살짝 좋은 상태였고, 두툼한 자주색 스웨터 소매 아래로 나온 주름진 손이 소리 없이 허공을 누르는 걸 보면서 그게 그날 본 광경 중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악보를 훔쳐보게 되었다. 전차에서 내릴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상으로 나오자 해가 여태 지지 않아 날이 아직도 밝았다.


땅을 보고 걷고 있었는데 누가 앞을 가로막길래 놀라서 고개를 들었더니 친구의 애인이었다. 멀리서 나를 보고 놀래켜주려고 나무 뒤에 숨어 있었는데 내가 도통 앞을 쳐다볼 생각을 하지 않길래 김이 샜다고 하면서 그 애는 나를 있는 힘껏 안아주었다. 그 애는 예전부터 항상 그런 식으로, 집 근처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면 돌담이나 차 뒤에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 나오며 나를 놀래키곤 했었다. 포옹이 너무 세서 턱과 목, 어깨와 갈비뼈가 아팠다. 졸업하면서 이곳을 떠나게 된 친구는 끝이 빤히 보이는 이 연애를 계속 하네 마네, 몇 달을 고민했고 그 기간 내내 나는 괜히 그 애를 모른 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봤자 그 애가 일하는 식당 앞을 지날 때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던지, 내 생일에 그 애를 초대하지 않는다던지, 그 애는 눈치도 못 챘을 사소한 노력들이었지만. 어쨌든 이제는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당분간은) 없게 되었다. 몇 주 전에 비로소 자기 스물 한 살 생일이 지났으니 다음에 같이 술이라도 마시러 가자는 말에 그러자고 대답하며 돌아서다가 싱글벙글 웃는 그 애의 모습이 눈가에 잔상으로 남아서, 아는 척하지 않았던 날들이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발음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몰랐을 그런 노력.


요즘의 나는 조금 쉽게 운다. 딱히 개인적으로 슬픈 일이 있어서 우는 건 아니고, 글을 읽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보고 마음 밑부분이 왈칵대면 이내 흑흑거리며 운다. 울고 나면 기분이 개운해진다. 그 개운함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기분 좋은 것이어서, 나는 손가락으로 문지른 눈두덩이가 빨개진 상태로 뭐 더 슬픈 건 없나 주변을 뒤진다.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면 우는 건 겁나지 않는다. 정말 겁이 나는 건 마음이 왈칵거림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지 않을 때다. 울지 못하는 기간이 한 달을 넘어가면 나는 불안해진다. 심신이 힘들어 생리를 건너 뛴 여자처럼, 내 몸이 혹시 정상이 아닌 상태인가 싶어 긴장하게 된다. 눈물이 나지 않는 기간이 어느 이상 되면 마음의 왈칵댐마저 드물어질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정상이 아닐까 고민하게 될까 봐, 나는 울 수 있는 방안를 필사적으로 모색한다. 울고 나면 한동안 안심하고, 그렇지만 한 번 울면 멈추기가 힘들어 한동안 울고, 결국 개운함은 도를 지나쳐 피로 비슷한 것이 된다.



가끔 비가 오기도 하지만 날씨는 자주 좋아서 바깥에 나가 있고 싶어진다. 오늘 낮에는 카약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계속 일을 하다가, 자꾸만 움직이는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서 자리를 세 번 정도 옮겼다. 카약에서 만난 친구가 저녁을 먹자고 해서 친구가 모는 차를 타고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갔지만 일요일 저녁이어서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주말엔 놀겠다는 유러피안 피는 못 속이는 거지, 친구와 헛웃음을 나누며 의대 쪽으로 갔다. 차에서 내릴 때, 길가에 두껍게 쌓여 있던 은행잎이 차 문에 쓸려가며 서걱거렸다. 예쁘지는 않았다. 친구는 처음 와본다는 식당에서 친구와 나 둘 다 해산물 요리를 주문했고, 길 건너에서 야구를 보며 한탄하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빵을 뜯어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피곤했다. 이번 주 방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니 사방이 다소 어지럽다. 더 푹신한 곳에서 자고 싶어서 이불 하나를 더 꺼낸 바람에 침대마저 엉망이다. 다른 색깔과 다른 두께의 이불 사이에 엉망으로 구겨져서 잠이 드는 시간이 좋다.



+ body language - you c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