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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it takes a lot of courage to go out there and radiate your essence,"


일주일 내내 어쩐지 계속 피곤에 쩔어 있었지만 기계처럼 삐걱대며 항상 움직이고 있었다. 지칠 때까지 나를 내몰고 가장자리의 나를 구경하는 꼴이었다. 퇴근이 약간 늦어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자, 친구는 영화 상영시간에 늦겠다며 매운 걸 잘 먹냐고 묻더니("참, 너 한국인이지. 괜한 걸 물었네.")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그린 커리와 호이신 소스가 들어간 볶음면을 사두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학교 밥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몇 년을 살며 처음 가본 영화관 로비에는 표를 파는 할아버지의 앞을 못 보는 늙은 개가 앉아 있었고 화장실에는 박하사탕이며 카라멜 등이 잔뜩 쌓여있었다. 나와 친구는 팝콘과 사탕을 먹으며 <The Master>를 봤다. 영화가 끝나자 기분이 무거워졌는데 영화 때문인 건지 피곤한 건지 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은 <The Master>의 마지막 상영날이어서, 영화를 다 보고 밖으로 나오자 매표소 옆에 걸려 있던 포스터가 <Life of Pi>로 바뀌어 있었다. 친구와 나는 간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걸었다. 그렇게 피곤한데도 억지로 돌아다니며 무리해서 그런지, 다음날 아침 일어나 혀로 쓸어 본 입 안은 우둘투둘했다.


비닐처럼 살살 일어나는 입 안 껍질을 혀로 건드리고 살짝 씹어보기도 하면서, 내가 우연히 발견한 위선과 미처 헤아리지 못 한 간격을 생각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치약을 이리저리 비틀어 칫솔 위에 짜냈고 골치가 아파졌다. 거울은 안절부절못하게 더러웠지만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치약을 사온 것은 잘했다고, 이 치약을 다 써도 양치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칫솔로 입 안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아내며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구강 건강에 좋은 센소다인.


며칠은 너무 피곤해서, 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의식을 억지로 잠 속으로 구겨넣었다. 자라, 잠들어라. 눈을 감고 나를 혼내듯이 졸음에게로 몰아내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곧 잠들겠다는 생각에, 내일이면 몸이 가뿐하리라는 희망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흐뭇한 마음에 눈을 떠보면 한밤중이었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시계는 딱딱하게 생긴 숫자를 뻘겋게 뱉으며 나를 비웃고, 나는 눈을 감고 나를 다시 재우고, 두 번 정도 더 자다 깨면 드디어 아침이었다. 이후의 나는 석연찮은 기분으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 아래 서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도 출근해서 한참 일을 하다가 문득 왜 이렇게 피곤한가,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안부를 물어오는 옛날에게 한껏 조롱을 당하다가도, 잠에서 깼을 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맡의 흰 벽을 만지면서 한 번쯤은 나도 나를, 너를, 함구하고 있던 우리 마음과 시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잠꼬대처럼 항변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아침마다 한쪽 벽이 겨울처럼 밝아오면 나는 별로 부끄럽지도 않아서 부끄러웠다.


그래도 일은 힘든 만큼 재미도 있고, 그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작은 부분에 깃발 꽂는, 말하자면 놀이다. 이걸 하지 않고 있는 나를 상상하기 힘들다, 아직까지는.


 


+ baths - maxima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