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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in a matter of time, it would slip from my mind,"


분명 비가 잦아든 틈을 타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는데, 절반쯤 왔을 때 또 비가 쏟아졌다. 몸의 절반 이상이 비에 흠뻑 젖었다. 우산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쩔 줄 몰라하며 실험실에 들어갔더니 동갑내기 랩텍은 빗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고 껄껄 웃고는 병원 근처 대학의 북스토어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급하게 산 트레이닝 바지는 남자용이라 그런지 제일 작은 사이즈였는데도 컸다. 하루 정도 입어보고 불편하면 나중에 환불하려고, 가격표도 떼지 않고 허리와 바지 밑단을 접어서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병원 분위기가 좀 보수적이다보니 자꾸 눈치가 보였다. 입학 면접 이후로 처음 뵙는 교수님은 악수를 청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잠옷을 입고 오면 어떡해요? 교수님, 이건 잠옷이 아니구요...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하늘은 환해졌고 오후에는 땅에 빗물 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세인트루이스도 이랬었는데. 중서부 특유의 날씨는 어디 가지를 않네. 하루종일 흐릴 줄 알고 선글라스를 챙겨나오지 않아서, 퇴근할 때에는 쨍한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침에 빗물을 헤치고 병원으로 가면서 봤던 라벤더들은 사정없이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직각으로 꺾여서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오후에 보니 언제 그랬던 것마냥 다들 파랗게 살아있었다. 재작년 학교가 얼음폭탄을 맞았을 때에도, 수선화들은 비슷하게 패배한 모양으로 바닥에 쓰러졌었다. 그때 걔네들은 눈 녹는 것처럼 다 죽었었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를 않아. 여름이라서 그런가봐. 다들 억지로라도 싱싱하다.




예전에 같이 살던 애는, 비행기 사고 이후로 며칠 동안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고 말을 걸어왔다. 공항에서 보안검색대로 향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열렸다 닫혔다 하는 문 사이로 하염없이 손 흔드는 부모님의 모습. 몇 개월 뒤면 다시 만나겠지, 하는 설레임. 그런 것들이 자꾸 생각난다며, 어떻게 보면 자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건인데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서 자기가 너무 과민한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과민할 때도 있는 것 같다고, 네가 이상한 게 아니니까 견디고 있으라고 위로 섞인 대답을 해줬다: 나는 보스턴에서 폭탄이 터졌을 때 그랬거든. 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읽는데 자꾸만 귀가 울렸어. 전철에서 내리면서 엄마와 통화를 했어. 엄마, 어떤 사람들은 결승점을 고작 몇 피트 앞두고 다리가 끊어졌나봐. 완주를 마친 마라토너들이 부상자들에게 수혈을 해주려고 병원까지 계속 달렸대... 엄마는, 너 며칠 있다가 코첼라 간다며, 사람 많은 곳 가도 괜찮은 거니? 했지만 나는 전화를 끊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갔고,


그날 밤은 그렇게 지났다. 며칠 후의 코첼라에서는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잔디에 누워 하늘을 가로지르는 줄에 열매처럼 달린 풍선 갯수를 세다가, 내 옆에 앉아 남에게 얻은 담배를 피며("우리 동네는 담배 한 개피 부탁하면 1달러 받던데 여기 애들은 안 받네, 축제라 그런가...") 잠자코 공연을 보고 있던 친구의 평화롭네, 평화롭다 진짜. 탄식에 가깝던 감탄을 듣고 어째서 이런 둥글둥글한 평화는 우리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건지 생각했고,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저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당신 평화를 주신다며요. 어제는 혼자 점심을 먹으면서 피플지를 넘겨보다가 의족을 달게 된 보스턴 마라토너들의 인터뷰를 읽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때의 내가 주렁주렁 달고 있었던 기분들은 잊지 않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어떤 이야기에 우리가 어쩌다가, 어쩌다가 영향을 받게 되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모르겠다. 그 이유까지 속속들이 다 알면 재미없겠지. 그도 그럴 것이, '어쩌다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되면 그건 더는 '어쩌다가'가 아니잖아. 그냥 그렇게, 외부의 이야기들이 내 주위에 모이고 모여서 결국에는 하나의 망(網)을 이루기도 하는 거야. 가끔은 자연스레 퇴화하는 시냅스도 있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다.



+ beach house - walk in the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