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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my big dreams walk behind me, they trick, they scheme, they tease,"


2년 가까이 일했던 곳에서는 실험실 사정으로 동물 실험을 직접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로테이션 랩에 들어가자마자 포닥 오빠에게 부탁해서("저 그냥 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가르쳐주시면 될 거에요.") 쥐(마우스)를 올바르게 손에 쥐는 법부터 각종 수술 및 해부를 배웠다. 며칠 전 쥐를 마취시키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오빠가 이제 꽤 능숙해졌네, 하셨다. 습성을 익히니까 이제 좀 알겠지? 네, 동작과 동선이 보여요. 환하지는 않더라도 뻔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습관과 성질이라니요.



어제 오늘 처음으로 동기들을 한자리에서 만났고, 재학생들도 많이 만났다. 학교의 돈자랑(?) 또한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풍족한 게 좋다.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니까 최대한 넉넉하고 걱정없는 환경에서 마음껏 배우고 싶다,는 욕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그게 대학원을 고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넘침이 좋으면서도 부담도 된다. 저쪽이 나한테 투자하는 만큼 나도 뭔가를 입증해야만 할 것 같잖아. 우리에게 왜 이렇게 많이 떠먹여주나, 이러다가 대체 어쩌려고? 이런 쓸데없는 고민도 했는데, 환자들의 니즈가 무조건 최우선, 양질의 치료를 위해서는 최첨단의 연구를, 훌륭한 연구자 양성을 위해서는 아낌없는 교육을. 이게 여기의 로직인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당신들의 바람대로 훌륭해질지는 의문이지만 저에게 잘해주시겠다는데 굳이 막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갑작스런 청구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잘할 테니...


그러나 진심으로 좋아하면 결국에는 잘하게 되어있는 구조니까 걱정은 그만하기로 한다. 학장님은 우리가 모여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테이블 앞에 서서 편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I'm a nonconformist, and I urge you to become one too.

Skepticism is essential.

Go protest.

Doubt every dogma.

You are here to change textbooks.


상대방이 누구건 간에 같은 높이에서 생각을 겨룰 수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다. 내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는 날 예전 실험실 교수님은 우리 집 근처에서 점심을 사주시면서, 십여 년 전 여기서 학교를 다니실 때 당신 지도교수님과의 첫 미팅에서 들었던 말을 구전해주셨다: 내가 앞으로 자네한테 어떤 실험을 하라고 시키면 그게 어째서 하기 싫은지 반박할 거리를 잔뜩 고민해서 와, 과학적인 구실을 만들어서 나에게 덤비라는 뜻이야.


지도교수에게 조목조목 따지라니,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온 나에게 그건 커도 너무 큰 문화충격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맞는 거잖아. 첫 만남에서의 그 말 때문에 정말 많이 배웠던 같아... 넌 내 제자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온 대학원 후배가 됐기도 하니까, 잘 했으면 좋겠거든. 그러니까 이걸 잘 기억해. 나는 그때 마지막 집 청소를 하다 말고 급하게 나오느라 온몸에서 클로락스 향을 퐁퐁 풍기며 일식집에 앉아 있었다. 그 전날 친구들과 많이 아쉬워하느라 밤을 거의 샜고, 피곤했고, 머릿속에는 몇 시간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탈 생각 뿐이었고 졸려서 몽롱했지만 그 와중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사합니다, 새겨 들을게요, 했다. 지금 더듬어봐도 그 광경 그대로다. 어떻게 비몽사몽 새겨 들었나보다. 다행이다.



+ blue hawaii - try to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