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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낮 무너지는 세월이다. 별수 없이 무릎이 꺾이는 경험들을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일일달력을 뜯어내는 기분으로, 내가 꺾여나간 횟수를 센다. 비슷한 경험이 연속이 되면 그게 세월인 것 같다. 훗날의 남이 보면 이건 시절이고, 시대겠지? 그냥 얼른 시절과 시대가 되어버리고 싶다. 항상 좀 줌 미팅 시간에 맞춰 오피스에 도착하려고 서둘러 걷는데 대학교 룸메이트 친구들 단체챗방 알람이 왔다. 몇 년 전부터 점성술에 심취해있는 친구가 동지를 축하한다며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는데, 토성과 목성이 400년 만에 근접해서 어쩌고 저쩌고. 친구는 내가 모르는 별자리 단어 몇 개를 섞은 긴 설명을 하더니 “게다가 오늘은 동지이기도 하니 앞으로 낮은 길어지기만 할 것이고, 한 해가 힘들었던 것만큼 오늘은 야망 가득한 계획을 세워.. 더보기
모든 뜻밖에의 완전한 ( ) 환희를 상상하는 일도 때론 지친다. 쳇바퀴도 쳇바퀴 나름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 건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누워서 오늘은 어떤 기분을 입고 집을 나설까, 그걸 한참 고르다 그렇게 골몰해진다. 원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아직 관성처럼 더워서 그런가? 내가 있는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내 전생을 관람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아 곤란해지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그 마음을 빙판 가로질러 갔다. 여름에도 도무지 녹을 줄을 몰랐다. 매년 8월마다 보이후드를 본다.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어떻게 매년 그러고 있다. 세포 주기 검문 지점checkpoint 같은 메커니즘의 개인적인 연례행사인데 아무리 같은 영화를 거듭 보는 거라지만, 지난 관람에서 이번 관람 사이의 한 해 동.. 더보기
나의 모든 산에는 산불이 났네 출근길에는 다들 며칠 뒤의 허리케인에 한마디씩이었다("재앙은 하나만 오지 않지").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삼 년 전의 집단 트라우마다. 내 오피스 책상 근처의 친구는 이번 주 내내로 계획해뒀던 동물실험을 일찌감치 취소하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번 주 일을 어떻게 계획할지 머리 굴릴 새도 없이, 팔꿈치에 끼고 출근한 커피 텀블러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곧바로 벤치로 가 장갑을 꼈다. 두껍게 깔아둔 드라이아이스에 쇠로 된 상자를 올리고 그 위에서 사람 뇌조각을 작게 잘랐다. 도움을 자청한 다른 사람과 2인 1조로 일하니 혼자 일할 때보다 훨씬 수월했고, 실험 준비는 일찍 끝났다. 뇌를 자르는 내내 샘플번호를 거듭 맞춰보았다. 숫자를 읽을 때는 꼭 영어 아닌 한글로 읽게 된다. 우린 많은 것들을 설명 없.. 더보기
아주 슬프고 매우 위험한 가장 경이로운 재택한지 한 달이 넘었다. 벤치를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은 많아 대부분 바쁘다. 일의 범위는 물론 한정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건강, 상태, 신분, 위치, 거리, 안전, 제한, 어제, 오늘, 내일...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하느라고도, 바쁘다. 생각을 하지 않고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기본값인 그것들을 하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시간을 쓰고, 결국에는 바빠진다. 고여 있는 기분이 이 막연한 바쁨에 한몫 하지 싶어서, 날씨가 너무 나쁘지 않으면 집 옆 공원을 걷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코스로 다니다보니 그 시간에 산책하는 개들의 얼굴을 익하게 된다(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거나 얼굴을 가리고 있거나, 우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더보기
thou shalt not kiss and tell 아주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와 어떻게 극적으로 연결이 되었다. 친구의 생일에 맞추어 나는 연을 날리듯 텅 빈 곳으로 메세지를 보냈는데 늘 답이 없던 친구가 이번에는 두 달 정도의 텀을 두고 답장을 했고, 답을 기대하지 않던 난 친구의 답장을 며칠 늦게 봤고, 또 이렇게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될까 걱정하던 찰나 다른 친구 한 명을 다리 삼아 다시금 연락이 되었다. 둘은 서울 어딘가에서 만나 내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잘 바람이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잠옷 차림으로 인사를 했다. 근황을 묻고 옛날 이야기를 하고, 한참을 웃고 떠들고 다시 인사를 하고 당부도 하고 잠이 들었다. 당시와 직후에는 분명 너무 반갑고 좋은 마음뿐이었는데 이후 며칠 동안 자꾸만 비틀거리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예상치 못하게 .. 더보기
녹푸른 나뭇가지 늘 새의 노래 들리네 ​​​ 모바일 앱으로는 음악을 자동재생 되도록 링크하는 법을 모르겠다.​ 적어둔 2017년 결산은 올리지도 못한 채 1사분기 끝을 바라보며 봄을 맞았다. 오늘 낮에 기계를 하나 돌려두고 마침 시간이 비어, 인터뷰 하러 온 사람의 톡을 보러 갔는데 창문 밖에서 자꾸만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서 집중을 못했다. 북동부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눈폭풍에 여기의 맑은 하늘에도 덩달아 강풍이 일어서 나뭇가지가 넋놓고 흔들리는 소리였다. 움직이는 나뭇가지 사이사이가 눈부시게 밝았다. 조는 생일선물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나뭇가지에 새 두 마리 앉아 있는 그림을 받았다. 거기에 수놓여 있는 한자를 오랫동안 읽을 수 없었다. 2016년에 제일 좋아했던 시인은 소설을 퇴고 중에 있고, 지구에서 우리는 잠시 아름답고, 나는.. 더보기
헤아리는 대신 세어볼 수 있었다면 나는 그걸 숫자라고 불렀겠지 월초의 보물같은 긴 주말 겸 생일 기념으로 다녀온 뉴욕에서는 한낮부터 한바탕 취했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떠들었고, 철로를 따라 걸었다. 나름의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들려오는 허리케인 소식에 밀린 일을 처리하는 중간중간 물을 구하러 다니고 차에 기름을 채우는 등 정신없이 채비를 하다가, 작년 허리케인 매튜 때 한바탕 대피를 하면서 이 소동은 디펜스에 마치 어떤 이야기처럼 꼭 들어가고야 말겠지, 그런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그 짓을 설마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툴툴댔다. 기분이 안 좋은 걸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 내밀면 조는 검지를 내 아랫입술 위에 올리며 여기에 새 한 마리 날아와 앉을 수도 있겠네, 그런 말을 한다. 자기가 어릴 때 어머니가 하던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 허리케인.. 더보기
다들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지만 내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지 않으므로 얼마 전 손일기를 쓰다가, clinical이라는 단어를 '의학적인' 말고 다른 걸로도 번역할 수 있나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객관적인' 정도로도 번역 가능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이 상황이 '누가 봐도 이런 상황'은 아니었으면 한다는 거다. 죄다 내가 지어낸, 통역 불가능한 손발짓이었으면 좋겠다. 몇 년 전 DSM-5가 개정판으로 나오기까지는 장장 14년이 걸렸단다. 뭔가를 그렇게 아주 단단하게 객관화할 수 있는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건 뻔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참을성 없는 나에게 무슨 소용이자 의미이지? 어릴 때부터 늘, 여름을 꾹 참고 나면 내 생일이 온다고 생각했다. 월말이고, 이른 생일 카드를 같은 날 두 장 받았다. 독일에서 온 카드에는 영어와 독일어가 섞여 있었고 스티커가 잔뜩.. 더보기
눈꺼풀 감은 아래 번지는 빨강은 어디에서 왔는지 그 누굴 나무랄 수도 없네 재심사 중인 논문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들어갈 이러저러한 데이터 좀 찾아서 넘겨줄 수 있겠녜서, 마침 점심 세미나 가기 직전이라 거기에 다녀와서 자료 찾아 보겠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그 데이터가 폴더 어디에 숨어 있는지 기억이 났다. 공용 컴퓨터로 재빨리 파워포인트 파일을 찾아 이메일로 보내주었는데, 찾고 보니 파일이 거의 삼 년 전의 것이었다. 세미나 내내, 프로젝터가 쏘아대는 화면을 다소 아득한 기분으로 마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잠깐 숨을 쉬어 봅시다, 지금 당신의 상태는 어떤가요? 자꾸 이런 식으로 현상現象에만 치중해서 어떡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질책인가? 결국에는 그 중요성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인데, 아니 다들 현상만을 가지고 다투는 상황에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더.. 더보기
나열하고 보면 결국에는 모를 일을 네 안달과는 상관없이 휴식을 취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 것. 당연한 사실을 자꾸 잊어서 굳이 어디에 써놓아야 한다. 원래 집 냉장고에 주기적으로 사다 채워놓는 음료는 탄산수, 우유, 맥주, 와인,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나름 길었던 자취 기간 동안 집에 자발적으로 쥬스를 사다놓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1)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잠옷 바람으로 집 근처 데니즈에 가면 커피와 함께 오렌지 쥬스 한 잔을 시켜 마시던 내가 2) 그 데니즈가 얼마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문을 닫는 바람에 3) 언젠가 숙취에 오렌지 쥬스를 고파할 것이 걱정이 되어, 지난 달 장을 볼 때 오렌지 쥬스 한 통 큰 걸 사다 냉장고에 넣어뒀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집에서 숙취를 느낄 정도로 술을 마실 일이 없어서 쥬스 뚜껑도 뜯지 않고 있.. 더보기
저녁이 시들기 전에 서둘러 침대를 데우고 마저 누우면 일요일 밤마다 리와 전화를 한다. 자주 문자 주고 받으며 지내는 버릇은 둘 다 없기 때문에 조금은 의식적으로 만든 일정이다. 지지난 주에는 운전을 하면서, 지난 주에는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전화를 했고 그제는 집 거실 소파에 누워서 전화를 했다. 나는 월마트에서 막 돌아온 참이어서 발 아래에 비닐봉투 여러 개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였다. 그럼 둘이 언제 같이 살 거야? 당연하다는 듯 리가 물었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행복한 건 알겠다고, 그리고 그게 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나에게 리는 행복을 분석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행복은 그냥 행복이라고, 행복은 행복 그대로 끌어 안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건 나를 잘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열흘 전 모교가 있는 도시에 갔을 때에도 .. 더보기
고작의 소나기에도 방주를 타는 철 지난 습관이 있네 차 오일을 바꾸러 오토샵에 들렀다가 에어 필터에 브레이크 패드와 로터까지 갈고 나왔다. 두 시간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순식간에 거지 됐네 나 그냥 죽어야겠다, 엄살 부리니 땀이 다음 주 여행은 해야지, 했다. 요새 여행이 퍽 잦다. 어딜 그렇게 자꾸만 가니? 엄마가 묻는다. 그렇지만 나 어디론가 자꾸만 가지 않으면 천둥번개에 몇 번 잠 깨고 나니 맑고 선선한 봄날의 연속이다. 주초부터 미팅 발표를 하고, 많이들 이미 퇴근한 시간에 랩에 남아 시퀀싱을 셋업하고 있었는데 테크니션 한 분이 오늘 발표 좋았다고, 시작과 끝을 정해놓는 기분이 썩 좋지 않더냐고 물었다. 끝이 있다고 상상해본 거에요, 상상하는 일은 즐겁잖아요. 왠지 멋쩍어져서 그렇게 대충 하하 웃어 넘겼다. 그 분은 가방을 둘러매고 퇴근을 했고.. 더보기
사람들은 어떻게 홀로 수면을 취할 수 있습니까? 최근에 봤던 삼십 분 가량의 단편영화에서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집 옆을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 흔드는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기차가 도착하기 몇 분 전부터 창문 밖을 기웃거리며 기차를 기다리고, 기차가 집 옆을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집 안의 접시들은 아슬아슬하게 흔들린다. 그 단편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특정한 루틴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그 루틴이 예고 없이 흔들리고 깨어질 때의 환희에 대해 생각했다. 그 단편영화는 실화 바탕이고, 여자는 제인 버킨이 연기했다. 나와 동갑인 남자가 감독을 했는데 그는 취리히의 어떤 오케스트라 객원 멤버로, 첼로를 연주한단다. 루틴처럼 첼로를 켜는 걸까, 루틴처럼 영화를 찍는 걸까. 깜빡하고 창문을 있는대로 열어두고 잤다.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나의 루틴이 아.. 더보기
모든 성인成人의 동공을 믿으며 재작년 쯤 만났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사실 작년에도 연락이 한 번 왔었고 그땐 그걸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하루 정도 있다가 너도 잘 지내니, 했다. 팔 개월을 배만 탔다고 한다. 이제야 육지인 것이 실감이 나네, 뭐 그런 소설 같은 말을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는 몇 년 전 남해의 가족 공동묘에 수국을 들고 갔다가 바다에서 파도를 만난 뒤 실종되었다는 조상의 묘비를 본 기억과 제주에 사는 친척동생이 누나 저 대학은 육지에서 다니려고요, 했던 기억이 범벅이 되어 그래, 육지로 잘 돌아왔어. 역시나 똑같이 소설 같은 말을 한다. 가끔 어떤 말들은 내가 뱉고도 내가 뱉은 말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내 안에서 입 벙긋대면 나는 그 입술을 따라 읽고, 그저 따라 읽은 것 뿐인데 그 입술과 지.. 더보기
함께 무덤을 파던 날 우리는 사랑에 눈이 멀고 너무 많은 것들이 상관 없어지는 날이 오게 되면 어떡하나, 고민했던 것도 불과 얼마 전 같은데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상관 없어져 버렸고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지만, 아무렴 상관이 없다. 같은 이름을 불러도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상해 기분도 덩달아 이상해지던 적이 있는데 그마저도 더는... 아 그래 생각났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만 난 어디야, 어디 쯤이야? 목숨이 걸린 것처럼 물어오는 사람은 대충 책 덮어두고 정말이지 너란 사람은 나랑 아무런 약속도 안 해도 돼서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좀 구차해지기도 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려나 싶어서? 적막을 배경처럼 깔아두고 기어코 그런 생각 둥그렇게 주먹 쥐어서? 하지만 방금의 이것은 내가 머리를 겨우 치약 쥐어짜서 나온 외마디이고 나는 정말 상관.. 더보기
감정을 실어서 한 번 더 비행기 여럿 중 하나를 놓칠 뻔 했고 가까스로 좌석에 몸을 구겨 넣으며 침을 삼키다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아프리라는 걸 따끔하게 직감했다. 사실 잘못했던 일이 여럿 생각나긴 했지만 머리 한켠으로는 다른 시나리오를 열심히 재생했다. 해가 지기 전에 겨우 가방을 찾고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갑자기 "나 만족하며 살긴 했어도, 막 두근거리고 흥분될 정도로 행복했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 그 전날에는 카옌 페퍼가 들어간 달고 매운 커피를 마시면서 덩치가 나만큼 큰 개와 놀아주다가 아무 말이 나오는 아무 영화나 틀고 보다가 코트를 나눠 덮고 이불 낮잠 들었다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고요한 지붕에서 눈이 새처럼 후둑 떨어지는 걸 목격했다. 물론 몸이 온통 개털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눈밭이 모.. 더보기
2016 수국, 장미, 히아신스, 튤립, 이렇게 발음만으로도 입안 가득 풍성한 꽃 아닌 짖궂은 뿌리에 매달린 식물들 버릇처럼 해를 향한다. 노을 따라 집을 나서서 나의 동쪽 아닌 서쪽에 물을 두어봐도 딱히 나쁜 일이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시시했던 건 아니고, 특별하다 믿었던 것들을 신봉하다 관둔지 오래 되었지만 파도와 안개 앞에서는 자꾸 어지러웠으니까. 낙서 지우는 사람의 마음으로 간밤을 구길 때마다 나 이렇게 끝까지 재미 찾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에는 내가 있는 곳마다 거기가 곧 낙원인 걸. 그게 아니라면 이 서사는 다르게 설명 될수도 없다.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는다. 이럴 줄 알았을까, 싶은 그런 선명한 순간들은 어차피 창문만 열면 또 보인다. 그게 근육 기억이 아니라면 별 달리 뭐라고 불러야 했을.. 더보기
"라고 쓰려다,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 유하 '당신' 부분 편두통과 위통을 등가교환하고 앓아 누웠다. 엑세드린을 한 통 새로 사야한다. 예전처럼 존경하기는 힘든 사람은 자꾸만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걸 견디다 보면 시간이 움푹 파이고, 그걸 어떻게 감당하면 좋을지를 고민해본다. 잠에 숭숭 구멍이 뚫린다. 계단을 건반 짚듯 내려가면서, 좋아하던 많은 것들이 좋아했던 것들이 되어버린 것을 확인했다. 어쩌자고 한눈을 팔았다. 나 자신을 줄줄 싫어하고 있을 무렵 남들의 괜찮아 안 다쳤어?에 울컥하게 되는 경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괴로워하고 있는 나에게 큰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치만 의미 안 두기 왜 이렇게 힘들지?" "타고나길 스토리텔러라서 그래." 나뿐만 아니라, 상관 없는 두 사건의 개연성을 들먹이는 건 진화론적 관점에선.. 더보기
one more time with feeling 마지막에 묵었던 숙소의 호스트는 뒤늦게 연락해, 생각해보니 깜빡하고 수건을 주지 않았다며 미안해했다. 다음에 또 놀러오라고, 그럼 그때는 더 싼 방값에 수건도 각자 다섯 장씩 주겠다고. 그 숙소는 친구들이 대학원을 다녔던 차분한 도시에 있었는데, 걔네들이 나에게 굳이 가보라고 하길래 별 생각 없이 들렀던 곳이다. 고맙다고, 좋은 새해 맞이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거기에 다시 갈 일 아마도 없겠지만,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나를 보고 표정이 좋아졌다고 한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꽤 오래 걸렸고, 새해 첫날 말고는 푹 잔 적이 없어서 벌써 조금 지쳤는데도. 그저 덕담일까. 작년 마지막 날 탄 기차 안에서 본 새해 운세처럼, 그냥 일 없이 좋은 말들 뿐일까. 첫 실험부터 대차게 말.. 더보기
"I am writing this because people I loved have died." -- From My Michael by Amos Oz 추웠다가 더웠다가, 비가 오고 다시 추워졌다가 해가 나오고, 너무 많은 일이 남몰래 있었다. 주어를 헷갈려하는 사람에게 조금의 짜증을 내는 사이 올해도 어김없이 동지에 터치다운 했다. 내려가는 해를 보며 슬리퍼를 끌고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는 나처럼 막판에 연말 선물 사려는 사람들로, 그러나 주중이라, 꽤 고요히 분주했다. 집 거실에 꿇어 앉아 가게에서 사온 것들을 포장하는데, 이웃이 잠깐 핸드폰 좀 빌리자며 발코니 유리문을 쿵쿵 두드렸다. 그는 몇 주 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를 불렀고, 잡담 도중 아랫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알려주었다. 그 집이 비게 된 것은 인부들이 블라인드를 젖힌 채 내부공사를 하는 바람에, 대충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더보기
"하염없는 걸 좋아하는 내게 당신은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니? 아니면 발이 너무 시린 꿈을 꾸었니?"하고 다정히 물었다." -- 조연호 '농경시' 부분 친한 윗학년 친구 둘이 졸업을 했다. 둘 다 감사의 말 섹션에 나를 따로 싣고, 잊고 있던 사진으로 피피티를 도배했다. 교수와의 논의 끝에 졸업을 두 달 미룬 친구는 테네시 대신 메릴랜드에 직장을 잡았다. 은행이 있는 건물 옆을 걷다 마주쳐 얼싸 안았다.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떠나는 일은 오래 된 만큼 자연스럽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고, 그러나 그만큼 새롭게 가까운 사람들이 반드시 생긴다. 복도에 서서, 어두운 주차장 한가운데에 서서, 라디오 볼륨을 줄인 차 안에 앉아서, 바에 나란히 앉아서, 뒷뜰 가스등 둘레에 모여서, 자주 잡담을 한다. 얘기 도중 생각 없이 이름을 줄여 불렀더니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처음이네! 하고 누가 웃었다. 이름의 길이를 줄이는 일이, 누군가.. 더보기
"Suddenly I realize that if I stepped out of my body I would break into blossom." -- From The Blessing by James Wright '아득히 먼 춤' (2016, 임세준 연출) 이야기 도중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봤더니 기계가 꺼져 있었다. 요즘 자꾸만 핸드폰 충전을 잊고, 핸드폰이 꺼지면 꺼지는대로 둔다. 충전기가 손에 잡히면 그제야 핸드폰 충전을 한다. 새벽 한 시였다. 막 뽑은 필름을 손에 들고 계단참에 마주 보고 서 있던 한 시간과, 맥주를 마시며 천천히 밥 먹은 두 시간까지 포함하면 총 일곱 시간을 얘기한 거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믿을 수 없군. 너 때문이라며 서로 타박을 했다. 목이 아파서 기침을 했다. 애드빌을 먹었지만 버번도 마셨다. 나는 커피에 버번을 타서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커피가 없었다. 어차피 너무 늦었.. 더보기
"Sam closed his eyes, willing himself to unlearn object permanence." -- From Here I Am by Jonathan Safran Foer Mouchette (1967; dir. Robert Bresson) 막 집을 나서던 참이었던 것 같다. 너도 이메일 받았냐고,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말을 듣고 나서야 이메일 확인했지만) 받았지, 이 소식은 사실 며칠 전 들었지, 그렇지만 넌 페이스북이 없으니까 이제야 알았겠네. 어차피 넌 못 할 거잖아? 내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친구는 자기는 이거 하면 안 된다고 못 한다고,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에라 몰라 나도 할래 상관 없어 신경 안 써, 했다. 그게 왠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서 좀 웃었다. 이름 같이 올라가겠네. 같이, 라는 단어에 다소 위안을 느끼며 그러겠네, 대답을 하고- 독립적인 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