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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Sam closed his eyes, willing himself to unlearn object permanence."



-- From Here I Am by Jonathan Safran Foer






Mouchette (1967; dir. Robert Bresson)






막 집을 나서던 참이었던 것 같다. 너도 이메일 받았냐고,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말을 듣고 나서야 이메일 확인했지만) 받았지, 이 소식은 사실 며칠 전 들었지, 그렇지만 넌 페이스북이 없으니까 이제야 알았겠네. 어차피 넌 못 할 거잖아? 내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친구는 자기는 이거 하면 안 된다고 못 한다고,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에라 몰라 나도 할래 상관 없어 신경 안 써, 했다. 그게 왠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어서 좀 웃었다. 이름 같이 올라가겠네. 같이, 라는 단어에 다소 위안을 느끼며 그러겠네, 대답을 하고-


독립적인 세상이 여럿 있어주는 것만이 나의 위안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순수히 운좋은 일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인생 통틀어 가장 단단하고 온전한 자아를 가지고 있구나, 깨달으며 감사한지 불과 몇 주 만에 매일 아침 마음 천장 한구석이 무너지고, 그것을 겨우 재건하기 무섭게 다른 구석이 우그러지고, 그걸 반복하다보니 괜찮은 척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뛰어다니던 나도 조금은 지쳐버리고 마는 거야, 허리케인 대피령 때 서류들을 챙기고 차를 짐으로 채우다가 먼지가 상자 뚜껑에 몸을 쿵쿵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컥해버리고 말았던 것처럼.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이렇게나 큰 폭으로 영향 받아서 어떡하니?


-싶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기 때문에 영향 받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면 영향받지 않는다. 걱정은 좀 하겠지만. 게다가, 삶에 대한 나의 애정은 타고나길 입체적이라 마치 평면도처럼 돌돌 말아 어딘가에 꽂아둘 수도 없다. 피뢰침 같은 y축을 짊어지고 어쩔 수 없이 무거워한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부정당하는 느낌은 아득함에 가깝다.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혹은 다시금 알았다. 자기의 입방형은 주장하면서 남의 부피는 너무 간단히 해체한다. 난 못하겠는데. 사방으로 뻗은 저 사람의 축에 나는 함부로 손대지도 못하겠는데, 쟤는 아닌가 봐. 여러 번 놀랐다. 억울하진 않았지만 많이 슬펐다.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었나보다. 울다 들어간 가게의 와인 섹션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다시 울었다. 장을 못 보고 가게에서 그냥 나와버렸다. 오랜만에 외박을 했다. 내 옷이 아닌 옷을 빌려 입고 추위에 떨며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나 존중받고 싶다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나 왜 운 거지?


이게 내게 어떤 가치이고 어떤 의미인지, 알아? 내가 그렇게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것만큼, 남의 믿음-그것이 아무리 틀렸다고 해도-을 부정할 권리 내게 있을까 늘 고민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믿음 아닌 옳고 그름에 관계된 일이고, 나는 종종 나의 믿음을 믿기 보다는 옳고 그름을 믿어버리고, 그런 나의 선택과 행동은 옳고 그름 앞에서 자신의 얄팍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기분을 결국에는 망친다. 그 사람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고, 그게 나는 별로 상관이 없다. 이런 어긋남이 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나는 모른다.


파도처럼 오가는 대화 속에서 조개를 줍는다. 그 사이에 계절이 하나 밀려버렸다. 일교차는 사납고, 편두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나는 조금씩 일찍 일어난다. 아침에는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 데에 시간을 배로 들이거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거나, 이따금 일출을 본다. '보러 간다'라는 표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이상하다. 지나치게 오래 살가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러지 말 걸. 너무 많은 약속을 했다. 그것도 그러지 말 걸. 신신당부하진 않았지만 그나마도 다행이면 어떡하지? 그러나 둘 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다. 갖은 노력 무색하게 네가 너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 soft hair - lying has to 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