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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나의 모든 산에는 산불이 났네

 

 


출근길에는 다들 며칠 뒤의 허리케인에 한마디씩이었다("재앙은 하나만 오지 않지").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삼 년 전의 집단 트라우마다. 내 오피스 책상 근처의 친구는 이번 주 내내로 계획해뒀던 동물실험을 일찌감치 취소하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번 주 일을 어떻게 계획할지 머리 굴릴 새도 없이, 팔꿈치에 끼고 출근한 커피 텀블러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곧바로 벤치로 가 장갑을 꼈다. 두껍게 깔아둔 드라이아이스에 쇠로 된 상자를 올리고 그 위에서 사람 뇌조각을 작게 잘랐다. 도움을 자청한 다른 사람과 2인 1조로 일하니 혼자 일할 때보다 훨씬 수월했고, 실험 준비는 일찍 끝났다. 뇌를 자르는 내내 샘플번호를 거듭 맞춰보았다. 숫자를 읽을 때는 꼭 영어 아닌 한글로 읽게 된다. 우린 많은 것들을 설명 없이 가만 두지 않으므로 이것에도 어떤 그럴싸한 인지과학적 설명이 있다.

그렇게 만든 샘플들의 값을 읽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층에 있는 기계 두 대를 이미 다른 사람이 쓰고 있어서였는데, 아래층 기계는 예전 언젠가 딱 한 번 써봤기에 사용법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 코워커에게 몇 가지를 확인받아야 했다. 기계가 다 돌아간 뒤 데이터를 뽑으러 폴더를 열었는데 8월 24일 파일이 두 개였다. 순간 내가 실수로 데이터 저장을 두 번 했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하나는 작년 오늘 날짜의 파일이었다. 기억난다 그래 그때 주말이었다. 주말이었는데 누가 또 기계를 쓰고 있었고, 취직한지 얼마 안 되어서 기계 예약 확인 시스템을 몰랐던 나는 이미 샘플을 플레이트에 다 깔아둔 상황이었고, (마침 오늘 문자했던) 코워커가 당황하고 있던 나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다른 기계를 보여주었다. 그땐 시간이 지나면 그런 신입의 흔한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건 맞았지만, 이렇게 지내고 있을 거라곤 미처

그러나 그렇게라도 날짜를 적지 않으면 매일매일의 경계가 뿌옇다. 이야기 도중에 요일을 더듬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두의 공유경험이다. 요일을 뒤죽박죽으로 기억한 친구는 줌 미팅을 빼먹고, 나는 "날짜는 그저 사회적 합의"라며 그를 놀린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서늘해진다. 이 시절의 나는 얼마나 많은 기억을 흘리고 있을까? 천성이 호더라 뭔가를 잃는다는 생각을 하면 목구멍이 막힌다. 하지만 내가 하루어치 겨우 살아낸 시간이 뭐 어떻게 막을새도 오늘의 습도처럼 흩어지는 걸 지켜만 본다. 할 수 없다. 갖가지의 노력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한다. 그러나 며칠 전(2020년 8월 19일 수요일 1:43am)의 일기엔:

"나의 계곡 같던 경험들이 무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용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쓸모있을 필요는 사실, 없다."

라고 적었고, 그건 내가 수면의 입구에서 문득 쏟아낸 용기였다. 소용없는 일들로 이번 여름을 가득 메운 나를 내가 위로하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얼마 전엔 무작정, 몸을 담그지도 않을 바다를 향해 차를 몰았다. 수면과 시선을 같은 높이에 두며 이것도 이것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용과 축복은 사실 좀, 동전의 양면처럼 비슷하지. 그래서 축복에 대한 나의 집착을 다소 버려야 하겠다고도 마음먹었다. 만신창이가 된 마음으로, 혹시 내가 지금 겪는 시간들이 내가 아직은 알지 못하는 형태의 축복일까? 생각하는 건 정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한 소용없는 일을 좀 더 많이 해도 좋겠지? 화분에 차례로 물을 주다 생각한다. 어차피 올 여름엔 너무 많은 걸 빼았겼잖아, 아니면 잃었던지. 막연한 배신감이 싫어서 차라리 내가 버린 척 한다. 왜 이럴까 나는, 감사가 모자라나? 결국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는 축복 찾는 일만이 답인가? 하지만 여기서 더 얼마나... 먼지가 밥그릇에 머리를 박은 틈을 타 물그릇에 물을 채운다. 다들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사적인 전쟁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전쟁을 남들이 알아줄 필요가 있을까? 그건 또 별개의 문제다. 몰려오는 구름을 직시하되 그 아래의 하늘을 잊지 않는 것처럼,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하마터면 해가 중천에서 내려올 때까지 또 물 한 모금도 안 마실 뻔 했다며 몸에 물을 우겨넣는다. (이것도 소용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