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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thou shalt not kiss and tell

 

 

 

아주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와 어떻게 극적으로 연결이 되었다. 친구의 생일에 맞추어 나는 연을 날리듯 텅 빈 곳으로 메세지를 보냈는데 늘 답이 없던 친구가 이번에는 두 달 정도의 텀을 두고 답장을 했고, 답을 기대하지 않던 난 친구의 답장을 며칠 늦게 봤고, 또 이렇게 몇 년 동안 연락이 안 될까 걱정하던 찰나 다른 친구 한 명을 다리 삼아 다시금 연락이 되었다. 둘은 서울 어딘가에서 만나 내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잘 바람이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잠옷 차림으로 인사를 했다. 근황을 묻고 옛날 이야기를 하고, 한참을 웃고 떠들고 다시 인사를 하고 당부도 하고 잠이 들었다. 당시와 직후에는 분명 너무 반갑고 좋은 마음뿐이었는데 이후 며칠 동안 자꾸만 비틀거리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예상치 못하게 예전 시간들을 다시 통과해서인 것 같고, 또 하필 연말인 점도 한몫 하겠지만

2015년 1월에 시작해서 이제야 겨우 끝내기 직전인 일기장을 덮으며, 접고 닫는 일들을, 끝난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일들을 생각한다. 지난 블로그 엔트리에 적었던, 좋아하는 시인의 소설은 올 여름에 흑백의 표지를 입고 출간되었다. 그를 나는 만났다. 작년 말과 올해 초, 나는 휴일을 사이에 끼고 한 달 여의 구직활동을 한 뒤 추운 곳이 아닌 더운 곳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정신없이 논문을 내고 디펜스를 하고, 디펜스 한 달 뒤 학교 본부로 올라가 후드를 받고, 보름 뒤 천 마일의 거리를 운전해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다음 날 바로 일을 시작했다. 하루마다 해가 너무 덥고 길었다. 일을 시작한지 열흘도 되지 않는 시점에 시인이 소설 홍보를 하러 나의 새로운 도시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잘 모르는 지리를 더듬어 외벽이 붉은 서점을 찾아갔다. 옥돌이 달린 목걸이를 한 그는 청중들에게,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다들 아름답게 생존해주어서 고맙다는 조용한 인사를 하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서점에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지난 달, 시인은 어머니가 암 투병 끝에 결국 돌아가셨다고 썼다.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불과 얼마 전의 여름에 대해 생각했다. 아시안 아메리칸의 서사가 자전적 회고를 넘어 견고한 문학으로 남길 소망한다던 시인의 더운 말이 마치 예고였던 것처럼, 연말을 맞이한 온갖 미디어는 그의 소설을 올해 최고의 소설로 뽑고 있고 그의 어머니는 페이지마다 그렇게... 문학이 되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일을 했고 겪었고 당했다고 생각되는 일 년의 끝에서 나는 생각하고 마는 것이지, 어떻게든 회귀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곧 끝날 일기장도 사실 일 년 정도,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서랍 구석에서 극적으로 찾아낼 때까지 내내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그걸 짐 더미 밑에서 끄집어내며, 안도 같은 걸 느꼈나? 책장 사이사이 끼워둔 빛 바랜 영수증과 비행기표를 보며 좀 의아해하기도 했고, 그러나 결국에는 이해하는 거지. 헐레벌떡 지나오느라 아무것도 적지 못해도 증인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건너편의 다정하고 솔직하게 건네는 말투 같은 것들만이, 이 지경으로 먼지를 입어도 줄곧 반가울 모습으로 살아남는다. 나를 어디에 누구와 어떻게 두었는지, 나는 어떻게든 풍부하게 재현해낼 수 있지? 구구절절의 프로토콜도 필요 없이, 누누이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