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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마음은 낮


무너지는 세월이다. 별수 없이 무릎이 꺾이는 경험들을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일일달력을 뜯어내는 기분으로, 내가 꺾여나간 횟수를 센다. 비슷한 경험이 연속이 되면 그게 세월인 것 같다. 훗날의 남이 보면 이건 시절이고, 시대겠지? 그냥 얼른 시절과 시대가 되어버리고 싶다. 항상 좀

줌 미팅 시간에 맞춰 오피스에 도착하려고 서둘러 걷는데 대학교 룸메이트 친구들 단체챗방 알람이 왔다. 몇 년 전부터 점성술에 심취해있는 친구가 동지를 축하한다며 문자를 보내온 것이었는데, 토성과 목성이 400년 만에 근접해서 어쩌고 저쩌고. 친구는 내가 모르는 별자리 단어 몇 개를 섞은 긴 설명을 하더니 “게다가 오늘은 동지이기도 하니 앞으로 낮은 길어지기만 할 것이고, 한 해가 힘들었던 것만큼 오늘은 야망 가득한 계획을 세워도 좋다”라며 오늘의 별자리톡을 마무리했다. 올해 순수미술석사과정을 끝내고 판데믹 스타일로 집구석에 간이 스튜디오를 차린 다른 친구 하나는 “동지에 골인하는게 이처럼 짜릿할thrilled 줄이야”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마스크 아래에서 혼자 숨죽여 웃으며 “고마워 나의 행성 친구”라고 적었다. 곧 나의 아이메세지 버블에 하트가 찍혔고, 나는 미팅 시작 2분 전에 오피스 로비의 체온탐지기를 통과했다.

친구가 조언한 것처럼 야망 가득한 계획...을 세우기에는 해가 떠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나는 여느 때처럼 일을 하다 문득 창문 뒤로 내려가는 해를 보았다. 며칠 전 나의 퇴근을 기다리던 코워커 한 명은 저 너머를 향한 나의 시선을 쫓다가 오늘은 노을이 예쁘겠네, 했다. 사실 요샌 그런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일같이 황홀한 노을을 봤고, 나는 퇴근길에 다리를 건너다 종종 눈을 감았다. 황홀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게 되는 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된다. 잠깐 감은 눈을 떠도 황홀은 그 자리에 가만 있어줄 것이라는 믿음? 바람? 야망 가득한 계획?

오늘은 일하던 중간에 집에서 차를 가져와 걷지 않고 운전해서 퇴근했다. 이제서야 말하지만 나라고 그렇게 산책길을 복기하는게 달갑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을 뿐이었지. 어차피 올해의 퇴근도 거의 마지막이다, 올해가 다 끝나가니까. 한 해 동안 너무 여러 번을 산 것 같다. 그만큼 좀 더 빠르게 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사진 속의 나를 전생 보듯 들여다보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기다려도 대답이 없다.)

아까는 냉장고를 비우다가 냉장고 문을 실수로 쳤고, 냉장고 자석과 사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가운데엔 내가 미처 버리지 못한 영수증도 있는데, 그걸 자석으로 굳이 고정시켜 놓을 땐 괴로운 가운데에도 꽃을 사던 너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고작 사료史料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나의 보잘것없는 수집벽일지도 모른다. 그땐 분명 어깨를 떨면서 울었는데 이젠 지워져가는 영수증 잉크처럼 그냥 다 희미하고, 또 그렇게 하나하나 의미와 이유를 따지기엔 내 마음이 너무 늙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닌데,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계획 같은 걸로 어떻게 야망차게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짧아진만큼 다시 살을 채워나갈 낮을 안다. 그것 또한 나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원래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니까. 사과를, 반토막나 애매한 포옹을,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행성들을, 때문에 나의 한구석에 조용히 일어나는 산사태를, 그냥 둔다. 보기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