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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모든 성인成人의 동공을 믿으며











재작년 쯤 만났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사실 작년에도 연락이 한 번 왔었고 그땐 그걸 무시했는데 이번에는 하루 정도 있다가 너도 잘 지내니, 했다. 팔 개월을 배만 탔다고 한다. 이제야 육지인 것이 실감이 나네, 뭐 그런 소설 같은 말을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는 몇 년 전 남해의 가족 공동묘에 수국을 들고 갔다가 바다에서 파도를 만난 뒤 실종되었다는 조상의 묘비를 본 기억과 제주에 사는 친척동생이 누나 저 대학은 육지에서 다니려고요, 했던 기억이 범벅이 되어


그래, 육지로 잘 돌아왔어.


역시나 똑같이 소설 같은 말을 한다. 가끔 어떤 말들은 내가 뱉고도 내가 뱉은 말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내 안에서 입 벙긋대면 나는 그 입술을 따라 읽고, 그저 따라 읽은 것 뿐인데 그 입술과 지나치게 똑같은 문장이 발음되면 내 독순술에 나도 놀라 이게 누구의 문장인지 생각한다. 혹시 이 말도 누가 이미 했었나?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참다 못해 그런 물음이 울음처럼 터져나올 때도 있다. 믿을 수 없어, 항변해봤자고 기억이 흐린 구간은 나도 어쩔 수 없어서 항복하는 기분으로 여러 가지 단서에 의지한다. 내가 남긴 기록이 그나마 가장 믿을만 하고, 제 3자의 기록은 가려가며 수긍한다. 결국 나 내키는 대로 재구성한 시간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통속적인 고해 뿐이다. 이 밖에 기억해내지 못한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보속으로 다시는 재미를 찾지 마세요, 라는 말을 들을까봐 그런 고해조차 끝끝내 미뤄버리지만


평생 재미 찾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늘 해왔고, 기저에 깔린 그런 공포는 나로 하여금 계속 재미를 찾게 만드는데,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건지 요새는 늘상 뭐든 재미있다.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어떤 형태의 재미가 있고, 재미가 있는 동안에는 굳이 다른 재미 찾을 생각이 들지 않고, 그러다 보면 고작 재미 찾아 헤매다 언젠가 나도 죽겠지,와 같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늘상 재미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탐색을 무한정 미루고 재미 속에 영생하려나?


우리 또 재미있는 일을 하자! 너는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마냥 돌고래처럼 신나하고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물장구를 친다. 모든 일이 어떤 식으로든 재미있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하지만 추궁하고 보니, 실은 내가 너무 불안해하는 바람에 기억나는 척 했단다. 쓸데없이 왜 그런 선의를 부렸느냐고, 나를 불쌍하게 여겼던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아마 나도 똑같이, 동정심 없는 투명한 선의로만 가득찬 마음으로, 똑같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물장구 치기를 우뚝 멈추고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닐까, 빤히 있는 나에게 그런데 너랑 나는 어쩜 똑같은 사람 같애.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내 눈을 똑바로 보고 그런 엄청난 말을 하고 나는 겨우 고개를 돌리고 있잖아, 그거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 아니야, 남의 입술 읽는 척 하며 내 입술을 읽어버린다.




+ mr twin sister - dan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