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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모든 뜻밖에의 완전한 ( )


환희를 상상하는 일도 때론 지친다. 쳇바퀴도 쳇바퀴 나름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을 상상해야 하는 건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누워서 오늘은 어떤 기분을 입고 집을 나설까, 그걸 한참 고르다 그렇게 골몰해진다. 원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아직 관성처럼 더워서 그런가? 내가 있는 사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내 전생을 관람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아 곤란해지면 나는 생각을

멈추고, 그 마음을 빙판 가로질러 갔다. 여름에도 도무지 녹을 줄을 몰랐다.

매년 8월마다 보이후드를 본다.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어떻게 매년 그러고 있다. 세포 주기 검문 지점checkpoint 같은 메커니즘의 개인적인 연례행사인데 아무리 같은 영화를 거듭 보는 거라지만, 지난 관람에서 이번 관람 사이의 한 해 동안 내가 통과한 시간과 사건들이 내 시선에 전에 없던 레이어를 얹어 버리니 어쩔 수 없이 매년 새로운 지점에서 놀란다. 올해엔 1) 한 씬에서의 배경이 집 근처여서 놀랐고 (작년 관람 땐 여기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몰랐다) 2) 올해에 이 영화를 볼 때 쯤엔 이미 오스틴에 다녀온 후일 거라고 작년에 확신했던게 기억나서, 그런데 아직 가보질 않아서 놀랐다. 정확히 말하면 판데믹 때문에, 가려다 여태 못 간 거지만... 그렇게 치면 재작년에 이 영화를 볼 땐 내가 텍사스로 이사 올 줄을, 알았나? 상상이나 했나? 전혀. 로멜다 음반을 틀어두고 구직 이메일을 쓰다가 문득 무더위를 상상하면서조차도, 몰랐다. 늘 그런 식이지? 어떻게든 무조건 뜻밖이지? 그런데도, 아무리 그 끝엔 다양한 환희가 있다해도, 확신이라니...

그렇게 올해의 세 시간 어치 연례행사를 마치자 9월이 왔다. 며칠 동안 매달려 겨우 끝낸 일을 넘기고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크루아상과 스콘, 커피를 사고, 그 옆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오스틴으로 차를 몰았다. 어딘가로 나를 자발적으로 이동시킬 때에 생기는 일종의 해방감이 있고 나는 기본적으로 고속도로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라, 수면 부족에 뒷목과 어깨가 찌뿌둥해도 마음은 편안하고 설렌 상태로 낯선 도시에 골인했다. 목적지를 향해 가며 속도를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하고는 야 여기가 6번가구나, 나 하나만 실은 차 안에서 그렇게 육성으로 말했다. 약간 헤매다 겨우 주차를 하니 윗층에서 S가 뛰어 내려왔다.

S와 푸드트럭에서 타코 다섯 개와 마가리타 두 개를 사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씹는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눴고 S는 다소 슬퍼보이는, 하지만 슬픔보다 괄호가 많은 표정을 했다. 건너편의 나도 그런 표정이었을까? 비슷하게 괄호가 많았을까? 묻지 않아서 모른다. 다만 우리는 이제 상대방이 얼굴에 띄워 올리는 괄호를, 이렇다할 추궁 없이 각자 알아서 채워내는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생일 전날 기분에 더할 나위 없었다.

음식을 다 먹은 나는 계속해서 머리가 아팠는데,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하루종일 커피와 술만 마셔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 물을 마시고 밖으로 나가 풀밭과 그 사이사이에 난 길을 많이 걸었고, 많이 걸었더니 나란히 누운 밤엔 정직하게 곧은 잠이 왔다. 생일 아침에는 잠이 덜 깬 상태로 씻고 식탁에 앉아 S가 막 끓여낸 미역국을 먹었다. 밖에 나가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또 걷고, 크고 조용한 실내에서도 한참을 걷다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대낮의 벤치 옆 영화관은 불이 꺼져 있었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 같았다.

버려진 것 맞지. 적어도 내버려둬져 버렸지? 아이스크림 컵과 스푼을 모아 휴지통에 넣었다. 그래도 난 할 만큼 했다. 정말이다. 그나마 그 가득한 믿음 하나로, 후회가 들어찰 자리가 없다. 약간의 반성은 한다. 오직 나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고 늘 생각해왔으면서 그와 동시에, 하지만 그런 내가 남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혹시, 를. 계절을 넘기고 뒤돌아보니 그건 완벽한 오만이었다. 내가 아주 시건방을 떨었다.

하지만 어떻게 깨지지도 않던 창문을 울면서 두드리던 그날 밤의 마음은 세상에서 나만 안다. 이건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