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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아주 슬프고 매우 위험한 가장 경이로운

 

 

 

 

재택한지 한 달이 넘었다. 벤치를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은 많아 대부분 바쁘다. 일의 범위는 물론 한정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건강, 상태, 신분, 위치, 거리, 안전, 제한, 어제, 오늘, 내일...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하느라고도, 바쁘다. 생각을 하지 않고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기본값인 그것들을 하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시간을 쓰고, 결국에는 바빠진다. 고여 있는 기분이 이 막연한 바쁨에 한몫 하지 싶어서, 날씨가 너무 나쁘지 않으면 집 옆 공원을 걷는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코스로 다니다보니 그 시간에 산책하는 개들의 얼굴을 익하게 된다(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거나 얼굴을 가리고 있거나, 우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새롭게 피는 꽃들도 찾는다. 이 지방에만 자라는 파란 꽃이 있다. 아주 흔한 꽃인가본데, 그동안은 철이 아니라 얘기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다가 몇 주 전부터 공원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언덕을 내려가면 있는 물 옆에 그 꽃이 더 많은지 그 아래로 내려가 사진 찍는 사람들도 보았다. 자잘한 꽃잎이 물감 찍어 그리고 싶게 생겼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 그것들을 지나치고,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날짜를 센다. 문 손잡이를 휴지로 감싸쥐고 만진 뒤 휴지는 바로 버린다. 화장실 세면대의 내가 한 번, 부엌 싱크대의 조가 한 번, 각자 한 번씩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노래 두 턴에 걸쳐 손을 꼼꼼히 씻는데

생일 축하합니다, 먼지는 백 살 하고도 두 살 먹었네,

유년시절을 여기서 보내지 않은 나는 그런 가사에 웃는다. 병에 걸리면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후각과 미각을 잃게 된다는데, 이 시기가 꼬리를 길게 아주 길게 끌며 우리를 지나치고 나면 우리는 설마 촉감의 일부를 잃어있는게 아닐까? 지금 내게 망설임 없이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은 조 뿐인데... 수건에 손을 닦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좀 춥던 1월 어느 날 혼자 보러 간 올해 첫 공연에서, 오레건에서 자랐다는 멕시칸 아메리칸 여자는

아주 슬프고 매우 위험한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을 찾으라며 시간은 우리의 등을 떠미네el tiempo nos empuja a buscar lo más maravilloso en un mundo bien triste y bien peligroso

그렇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본인의 노래를 불렀고 나는 맥주도 없이 우두커니 서서 시린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올해엔 또 얼마나 멋진 일들이 있을까? 생각을 했지,만 좋아하는 식당과 카페와 술집들이 차례로 문을 닫고 기대하던 공연들이 취소되는 걸 지켜보며, 키우고 있던 세포들을 이틀에 걸쳐 몽땅 얼린 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키러 가는 이들을 배웅하고, 아침 볕이 좋지만 두 사람과 동물 한 마리가 스물 네 시간을 함께 보내기에는 썩 좁은 아파트 안에 끝없이 구겨지고 펼쳐진 지금, 여기로, 별 수 없이 떠밀려왔다. 몇 주에 걸친 아득한 은신 속에서 아주 슬프고 매우 위험한 것들은 내겐 어떤 관념이 되어버린 기분이지만 경이, 가장 경이로운 것은... 그 슬픔과 위험이 비록 관념이라 해도 매일같이 새롭게 무거워서,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코워커 중 한 명은 곧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이번 주말 결혼 예정이었던 한 명은 집에서 파트너와 혼인신고서에 서명을 하고 각자의 집에 있는 하객들과 내년 같은 날짜를 기약하며 오늘은 일단 영상통화로 샴페인 토스트를 했다. 조와 나는 내일도 같은 산책로를 걷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개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점심을 먹을 것이다. 게다가 곧 기념일이다. 시간은 과연 멈출 길이 없다,니 누가 설계한 거지? pasará el tiempo, 이게 경이라면 경이고, 끝을 모를 동굴이다. 지리가 지리다보니 일찍 날이 더워지는 동네지만 나는 마치 겨울잠을 자는 것 같아서이다. 내가 공부하는 질병 단백질은 사실 동면하는 동물들 안에서도 비슷한 비정상 번역후변형을 겪어, 다만 인간 질병 뇌에서와는 다르게 그 동물들의 단백질은 동물들이 잠에서 깨 동굴에서 나오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겪는 지금 이런 것도... 그런게 아닐까? 오후 산책을 취소시킨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걸 뒤로 하고 그런 말을 거실 유리 탁자 위 지문처럼 늘어놓는다. 촉감을 잃지 않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