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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s of your look, like your touch, killing me by shoot," 타협과 협상은 다르다. 나는 전자만 능숙하게 할 줄 알고 후자를 해내야 할 경우에는 많이 버벅댄다. 조용하게 협상하는 사람들이 무섭고, 부럽고, 다시 무섭다. 오늘은 일하던 도중 남는 시간에, 박사님과 함께 아는 언니의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보러 옆 건물로 갔다. 언니는 발표 후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감정이 북받쳤는지 조금 울었다. 몇 달 전 졸업식 때 더위에 허덕이던 나와 예진이가, 박사 학위 받는 사람들의 가운과 모자를 보고 감탄하며 박사 할 맛 나겠다고 농담을 할 때에도 언니는 박사 후드를 뒤집어 쓰다가 울컥 울었다고 했다. 고생했던 기억이 쏟아지듯 다가온다고. 우리 건물로 돌아가면서 박사님은 너도 몇 년 후 발표 끝나고 엉엉 우는 거 아니냐고 하셨다. 글쎄요, 그건 일단 대학원 들어가고 나서 생각.. 더보기
"lonely trees, i'll give them company," 아쉬워한다. 오래 전 빌려주고 여태 돌려받지 못한 책. 귀찮아서 미룬 손빨래.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 실험. 회복하고 싶은 관계(와 회복하고 싶지 않은 관계). 내려 받지 못한 앨범(과 괜히 내려 받은 앨범). 사지 못하고 뒤돌아야 했던 양초. 쉽게 깜박이는 전등. 함께 갈 사람이 없는 공연. 물이 있는 곳에 갈 수 없는 생활. 이사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 이 집은 냉온방이 공짜라 굳이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퇴근해서 더운 길을 오래 걷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듯 내 방문을 열었을 때 변함없이 웅웅거리며 공기를 뿜고 있는 에어컨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를 위해 버텨주었다는 생각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 위에 누워 있으면 천과 살이 붙는 공간이, 내가 열을 억지로 가두고 있는 것처럼 금세 더워져서 .. 더보기
그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그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나도 꽤 내성적인데, 걔는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내성적인 것 같아."), 나는 그게 농담인줄 알고 음식 씹던 걸 멈췄다. 너는 너무 싱싱해서 종종 떠들썩하고, 요란한 걸 좋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하고. 나는 거기에 자주 웃고 손뼉을 치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고("네가 내성적이라고?") 그는 눈을 깜빡이며 그렇다고 했다. 화제가 바뀌었다. 그는 자꾸만 농담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농담이 아닌 이야기들을 농담처럼 풀어냈고 나는 그때마다 음식을 씹었다 말았다 했다. 후식처럼, 우리는 서로의 인생이 망해갈 수 있는 경로에 대해 수학적으로 이야기했다. 귀여운 자학 수준이던 것들이 이제는 현실이 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보기
간호사는 내 팔의 멍이 자기가 찌른 바늘 / Sun Glitters - High / 간호사는 내 팔의 멍이 자기가 찌른 바늘 때문에 생긴 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난 번에는 왼팔이었으니 이번에는 오른팔에 검사를 하자며 투베르쿨린을 내 팔에 주사하다가 이 멍 좀 봐, 최근에 피 뽑았어요?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지난 주에 내 피를 뽑으려다 실패하지 않았냐고 묻자 웃으며 어머 내가 그랬나 미안, 하지만 나는 이 검사를 너무 여러 사람에게 해주니까요, 라면서. 전혀 멋쩍어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건물을 나서자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어지러웠다. 나는 탈지면에서 알콜기가 완전히 가실 때까지 팔을 붙잡고 있다가 실험실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바짝 마른 탈지면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양팔이 얼룩덜룩했다.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심리학.. 더보기
며칠 전 올해의 첫 매미가 울 때 / Tame Impala - It Is Not Mean To Be / 며칠 전 올해의 첫 매미가 울 때 비로소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요새 들어 해가 꽤 강해지고 있지만 종일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다 보면 별로 더운 줄을 모르겠어서 편하다. 자전거 자물쇠가 고장이 나서 전철역까지 걸어다니고 있지만 오전에는 별로 덥지 않으니까. 퇴근길은 좀 덥지만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은 기분이 좋기 때문에 괜찮다. 여름에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을 골라 듣는다. 낡은 건물에서 살고 있지만 덕분인지 냉난방이 공짜라, 지난 주 신이 나서 에어컨을 실컷 틀어두고 잤다가 편도가 부어서 나는 심하게 앓았다. 아무리 껴입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결국 반차를 쓰고 일찍 퇴근했는데 해열제를 먹고 자다가도 추워서 몇 번을.. 더보기
하늘에 정전기가 일 때 시규어 로스의 Varúð를 / Sigur Rós - Varúð / 하늘에 정전기가 일 때 시규어 로스의 Varú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끔 번개,까지는 아니어도 카메라 플래쉬가 연달아 터지듯 밤하늘이 천둥 없이 아주 번쩍일 때가 있는데 기정이랑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자던 재작년 여름에는 그게 굉장히 심해서 한밤중에 나 혼자 종종 깨곤 했다. 꽤 오래 그런 하늘을 본 적이 없었는데 도서관 카페에 있다가 잔뜩 스트레스만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밤의 하늘이 오랜만에 번쩍였다. 어떤 경로로 우연하게 Valtari의 리크가 생겨 있던 덕분에 Varúð를 들으며 올려다 본 하늘은 굉장했다. 세상이 우아하게 멸망하기 직전 같았다. 집에 돌아와 때맞춰 통화를 하게 된 훈제에게 내가 방금 시규어 로스를 들으면서 집에 오다가 아주 멋진 걸 봤는데, 다.. 더보기
엄마가 귀국하시기 하루 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 2:54 - You're Early / 엄마가 귀국하시기 하루 전,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백 년도 더 된 옛 집(게다가 내 방은 북향)을 안 좋아하셨던 엄마는 새 집을 보자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다며 굉장히 흡족해하셨다. 짐도 짐이지만 가구를 옮길 재간이 없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인부들을 불렀는데(이사에 네 도움이 필요없게 되었다고 했더니 관우는 "하여간에 부모님이 오시면 헝그리 정신이 없어진다니까"라고 했다) 일이 수월하게 처리되는 걸 옆에서 보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방에서 짐을 풀고 있는 동안 엄마는 부엌에서 그릇이 든 상자를 여시면서 딸 시집 보낸 것 같다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에 엄마를 공항에 데려다 드리고 돌아왔는데 다시 잠들지 못해서 짐 정리나 계속 했다. 집 나와 사는.. 더보기
기말고사가 모조리 끝나고 집을 치우고 졸업생들 행사에 / Beach House - Walk In The Park / 기말고사가 모조리 끝나고 집을 치우고, 졸업생들 행사에 참여하고 아쉬워서 자꾸만 사람들을 만나고, 엄마가 오시고 나는 졸업을 하고, 지금은 엄마와 둘이서 여행 중이다. 스마트폰도 없는데 호텔에서 돈 주고 와이파이 쓰는 건 싫어서 인터넷 사용이 용이하지 않다 보니 구글 리더에는 읽지 않은 피드가 수백 개 쌓여 있다. 내일이면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 이사 준비를 한다. 엄마는 이사 다음날 귀국하신다. 총체적으로 정신이 없다. 아마도 6월 초부터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텐데 공부를 이렇게 쉬어본 적이 참 오랜만이라 모든 것이 생경하다. 이내 느릿한 여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지난 여름들의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결국 여기서 또 여름을 맞는다. 한.. 더보기
The Year of Getting to Know Us (by Ethan Canin) 앤과 나는 상담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상담가는 나에게 사람들로부터 친절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와 앤을 함께 상담하고, 앤을 따로 상담하고, 후에 나를 따로 상담했다. 상담실 바닥에는 아이들 장난감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본인 가까이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가 말했다. "맞나요?" "저는 꽤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상담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앤과 나는 결혼한지 7년째인데 가끔 나는 결혼의 역사라는 게 '사람들은 너무 많은 걸 원한다'라고 기록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와 앤은 지병이 없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늦잠을 잔다. 우리는 대체로 같은 것에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출퇴근 체증이 지나면 고요와 평.. 더보기
만져지는 것들이 좋다 분리의 개념이 여실할 때 / Rachel's - Wally, Egon and the Models in the Studio / 만져지는 것들이 좋다. 분리의 개념이 여실할 때, 유형(有刑)이라는 건 나를 포함한 누구나 적어도 약간은 안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다. 이건 모두 내 마음이 작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기댈 수 있는 단위를 설정한다는 건 배수진을 치는 일과 비슷하니까. 그렇게 나는, 추상의 물질로의 환원에 너무 쉽게 매료되었고. 관념이 만져지는 순간 나는 위안 받는다. 그래서 모든 반론들을 간과하며까지, 이러한 기승전결로 생물학을 하게 되었다고 자꾸만 내게 나를 성립시킨다. 내게 그런 내러티브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따라서 나는 이야기를 더욱 장황하게 지어내고, 그 근원은 내면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오래도록 일상이다. 볼.. 더보기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 신호등을 지나면서부터 Kent의 / Kent - 747 /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 신호등을 지나면서부터 Kent의 747을 들었는데 도입부에서 올려다 본 달은 손톱처럼 가늘고 창백했다. 해가 막 지려던 참이라 하늘은 보라색과 분홍색의 중간이었는데 달 아래에 그어진 비행운은 붉게 예뻤다. 도서관에 도착해 문을 열 때 마침 노래가 끝이 났고 그 덕에 나는 꼬박 7분 47초를 걸었음을 알았다. 이건 그저께의 일. 747을 듣기 시작한 건 지난 주에, 티볼리에서 다르덴 형제Dardenne의 를 보고 학교로 돌아가 늦은 저녁을 먹을 때 진석이가 그 노래를 가르쳐 준 이후, 다소 습관적으로. Kent의 열번째 앨범이 나온 건 오늘. 어제 오후에 이어서 오늘 아침에는 대학에서의 마지막 in-class 시험을 봤고. 금요일은 수업이 없으니까 내일은 .. 더보기
심포지엄 등록을 하고는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 Nils Frahm - More / 심포지엄 등록을 하고는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집 앞 카페에 도착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커피를 사려고 줄 서있던 친구가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왜 양복을 입고 있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심포지엄 진행요원 카드를 꺼내 보이며, 오늘 아침에 참가자들 체크인 하는데 오전 세션에서는 딱 너만 안 왔더라고 했다. 종이에 적힌 네 이름을 가리키며 이 사람 아냐고 서로에게 묻고 있는 다른 진행요원들에게 나 너 안다고, 너 전화번호 있다고 할까 하다가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말았지,라고 말하고는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머쓱해져서, 아파서 못 간 거라고 대답하는데 마침맞게 기침이 요란하게 연달아 터져주었고 내 주장의 신빙성은 올라갔을 .. 더보기
김기덕 감독 씨네서울 인터뷰 부분 김기덕: ... 나는 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집을 지었다. 씨네서울: 그럼 삐뚤어진 집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김기덕: 아니다. 선을 그을 때 현재를 보지 않고 마지막으로 갈 곳을 보고 그으면 자 없이도 똑바로 그어진다. 내가 집을 지을 때의 갈 곳은 토속적이고 자연적인 집이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지어졌다. 사실 자를 쓴다는 것은 불안이다. 똑바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 하지만 사실 이런 불안은 순간이라서 똑바르지 않는 게 뭐 그리 문제냐고 생각하면 금방 불안은 사라진다. 불안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리는 거다. ... - 김기덕 감독 씨네서울 인터뷰 부분 더보기
얼마 전에야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걸 / Mogwai - I'm Jim Morrison I'm Dead / 얼마 전에야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여태 모르고 살 수 있었냐는 내 질문에, 늦게나마 그 딱지가 나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것 같지 않니?라며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핸드폰을 만지는 것이었다. 화제전환은 너무 빨라서 많은 단어들은 사람들과의 제각각인 부딪침, 다음날 저녁과 밤의 계획, 자기가 거절한 여자들과 자기가 끌리는 여자들의 특징들을 돌고 돌더니 나중에는 만성적인 불면증에 대해서까지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멜라토닌을 여러 알 삼키고 나서야 생각들을 잠재우고 겨우 잠이 들었다고 하길래 나는, 그렇게나 많이 먹어야 잠이 오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술을 줄이는 건 어떠냐고 물었지만 술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면서(".. 더보기
오늘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잡담을 하며 잡숙제를 / Destroyer - Chinatown / 오늘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잡담을 하며 잡숙제를 하다가, 저명한 교수님의 강연이 있다고 들어서 그걸 보러 갔다. 강의실은 금세 가득 찼고 교수님이 강연을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필기를 했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연설용 목소리는 낮을수록 좋다고 했었지, 그게 청중에게 더 많은 신뢰를 준다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그러다 강의 중반 정도 되어서야 교수님이 트렌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본인이 직접 언급했다). 약간은 놀랐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애매한 목소리가 설명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존경심이 들었던 것이, 그 교수님이 두 가지 성별을 다 살아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계에서 여자.. 더보기
「히스 레저와 결혼하기Marrying Heath Ledger」 (부분) … 토요일 밤을 맞아 친구들은 신이 나서 오랜만에 술을 마시러 나갔고 그말인즉슨 새벽 네 시 정도까지는 집이 비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 니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니콜은 컵케익 가게에서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니콜은 통화를 마친지 10분만에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고 우리는 거실 소파에서 뒹굴며 사랑을 나눴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니콜은 내 방 침대보다 소파에서 하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서로를 안는 내내 니콜의 머리카락에서는, 그애가 아마도 컵케익 가게에서 묻혀 나왔을 달큰한 설탕과 짙은 버터 냄새가 났다. … 더보기
메트로를 타고 의대로 가면서 졸 뻔했다 그렇게 / Bag Raiders - Sunlight / 메트로를 타고 의대로 가면서 졸 뻔했다. 그렇게 쭉 자버리면 위험한 동쪽 동네로 가버리니까, 눈을 비비면서 신나는 음악만 들었다. 껌도 씹었다. 오늘은 일이 약간 길어져서 테크니션 언니와 함께 실험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의대 캠퍼스라 그런지 주변에 이런저런 병원들이 많은데 소아전문병원 식당이 실험실과 가까워서 가끔 거기서 밥을 사먹곤 한다. 학교로 돌아와서는 약간 늦게 스크리닝에 들어가서 맨 뒷줄에 앉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보다가 좀 졸았다. 도서관에서 페이퍼를 쓰다가 잠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에 짐을 챙겼는데 그걸 본 조쉬 오빠가 왠일로 벌써 집에 가냐고 했다. 그치, 그렇지만 오늘만... 밖으로 나왔을 땐 낮의 잔열로 공기가 텁텁했다. 아침 일찍 입고.. 더보기
어릴 때부터 과학소녀는 아니고 그냥 잡궁금함이 많았던 / Sóley - Pretty Face / (from WashU Problem Facebook) 어릴 때부터 과학소녀...는 아니고 그냥 잡궁금함이 많았던 나는(고1까지는 나 자신을 이과로 분류하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비구름의 경계가 한 구역을 지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곤 했는데 한 번도 그걸 직접 겪은 적이 없어서 그 상상은 항상 상상에서만 그쳤다. 몇년 전 이 날씨 변덕 심한 도시에 온 이후로는 그걸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는데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같은 학교 캠퍼스의 한 쪽은 비를 맞고 다른 쪽은 해를 쬔다. 전철역에서 학교로 걸어가는데, 올려다본 하늘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쪽은 지옥, 저쪽은 약속의 땅. 너무, 보란듯이 양가적이어서 우스울 정도로. 불행은 내가 하루를 보낸 의대 캠퍼.. 더보기
72.10비트 미안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이라도 듣고 싶고. 그 말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오가는 말은 드물고. 역시나 말에 기대는 나의 증상을 깨닫고. 손톱은 물어뜯을수록 작아지니까. 나는 내가 너무 작게 느껴져서. 내가 희미해졌는지 궁금하니까. 그 경도를 확인하는 순간이 겁이 나서. 차라리 나를, 찌르지 그러니. 바람이 불면 숨지 않고 앉아서 온몸으로 압력을 안고. 가끔 안부 대신 존재여부를 묻고. 모르는 사람들의 질문에 웃기만 하고. 그러다가 바람이 약하다 싶으면 고개를 들어. 저만치 있는 남들(주로, 성공한 동기들)을 봐. 내가 받는 축복과 내가 팽개친 기회들을 다시 한 번 망각해. 게으르게 살고 있어. 그저 너의 틈에 갇혀 뭘 하고 있나 의아해져. 차라리 나를, 죽이지.. 더보기
지난 주말에는 날씨가 봄날처럼 평화로워서 마음도 아늑할 / Peter Von Poehl - The Bell Tolls Five / 지난 주말에는 날씨가 봄날처럼 평화로워서 마음도 아늑할 수 있었다. 주말 직후에 있었던 퀴즈 공부를 했던 것 이외에는 소프트볼 연습도 하고 버블티도 마시고 여럿이서 숲공원으로 가 잔디밭에 앉아 있기도 하고 바빴어서 몇 주 동안 못 끝내고 있던 시집도 다 읽었다. 밤에는 친구들과 누군가의 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잼도 했다. 나는 반 년 동안 연주하지도 않은 카시오톤을 들고 갔는데 힙스터처럼 차려 입은 집주인과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와 악기를 한 번씩 만져보았다("잇츠 쏘 빈티지, 클로이!"). 누군가는 하모니카를 누군가들은 키보드를 또 다른 누군가들은 기타를. 어떤 한 아이는 이름도 모르겠는 악기를 가지고 놀았고 나머지들은 사방을 .. 더보기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 Gold Panda - Marriage /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노력에 대해 생각. 어디서 내가 글을 쓰며 살 팔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과학을 하는 어줍잖은 내 모습을 염려하고. 그 와중에,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자수성가는커녕 과학이 벅차 헐떡대는 나를 절대 이해 못 하시겠지(그간의 어록으로는 "집에 책상이 있고 심지어 자기 방이 있는데 돈 주고 독서실은 왜 끊나?"와 "학비를 대주는데 학점이 왜 만점이 아니지?" 등이 있다, 틀린 말씀이 아니어서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던 어린 나). 부모님과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런 얘기가 오갈 때마다 나는, 그러니까 그때 내가 피아노를 계속 했어야 한다며 웃었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엄마), 아니면 어차피 너는 .. 더보기
잠이 부족하면 나는 발성을 못 한다 다른 / Charlotte Gainsburg - Anna / 잠이 부족하면, 나는 발성을 못 한다. 다른 건 할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거나 타자를 치거나 음악을 듣거나 방을 치우거나 요리를 하거나. 그러나 허파에 공기를 넣었다 끌어내는 것, 그게 그렇게 힘들다. 경이롭다, 외부의 무언가로 내 공허를 채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니. 졸릴 때면 빈 속에 밥을 우겨넣는 것 또한 그래서 힘든 걸까, 엉터리로 추론하면서. 그러니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우리, 목소리 말고 다른 걸로 대화해... 체온이나 고요 혹은 응시만으로. 며칠 동안 절반 정도는 정신을 놓고 있었고, 주말은 대부분 혼자 보냈다. 끊을 것도 정하지 못한 상태로 사순절을 맞는다. 월요일 낮에는 낡은 문고리를 잡았다가 튀어나온 쇠조각 같은 것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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