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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t the matter of "could you" but "would you", 화분에 매일같이 물을 준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젤리형 비타민을 먹고 물을 마시고, 그렇게 출근 준비를 하면서 컵에 수돗물을 받아 흙에 골고루 물을 준다, 그리고 옷을 갈아 입고 기본 화장을 하고 가방과 사원증과 텀블러, 핸드폰과 방 키를 챙겨서 출근한다. 수국은 물을 참 많이 먹는다. 빨대 같다. 하루는 흙에 물이 너무 많아 뿌리가 썩으면 어쩌나 싶어서 이틀 넘게 물 주는 걸 걸러봤더니 그새 시들해져 있었다. 깜짝 놀라서 얼른 물을 주자 수국은 몇 시간 후 거짓말처럼 쌩쌩해졌다(너도 참 살아있구나). 그 얘기를 들은 남자친구는 조금 웃더니 죽이지마, 했다. 어쨌든 내 유일한 식물은 꾸준히 크고 있다. 꽃받침이 덜 자라서 왔던 것들도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색이 없던 모서리가 푸른색과.. 더보기
"would you love me over like a bottle of gin," 생일 선물 뭐 받고 싶어? 받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안 줄래, 뻔한 건 싫어. 남자친구는 나에게 그렇게 묻고 혼자서 그렇게 대답하더니, 생일날 낮 시간에 맞춰 반의 반 정도 만개한 수국 화분을 보내왔다. 너는 네가 나에게 안겨준 마음의 크기나 모양이나 색깔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예뻐? 좋아? 마음에 들어? 신난 나에게 차근차근 물어오고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너 같고, 꽃다발도 아니고 화분이라니 그것도 너무 너 같아서. 응 너무 예뻐 완전 좋아, 하면서 웃었다. 집에 살아있는 것이 들어오자 나도 더, 사는 것 같다. 새로 로테이션을 시작한 실험실은 지난 실험실보다 규모가 크고 일하는 공간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오늘 아침에는 본래 실험실이 있는 병원 본부로 가지 않고 위성 실험실이 있는 집 근처 병동.. 더보기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dynamic" and "destructive", 첫 로테이션을 - 내 기준에서는 - 무탈하게 마무리지었다.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여러가지를 배웠다. 떠나기 며칠 전에는 포닥 오빠로부터 붓을 선물 받았고("로테이션 다 끝나면 이 붓 쓰러 꼭 우리 랩으로 돌아오는 거다?") 마지막 날에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일식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운좋게 노동절을 끼고 사흘을 쉬었다. 주로, 잤다. 처음으로 주말 내내 쉰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졸려서 지치도록 잤다.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술도 마시고 한식당에도 가고 쇼핑도 하고, 벼르고 있던 운전 연습도 했다. 차 주인인 친구가 조수석에 앉아서 코치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스키드 마크를 볼 때마다 조금 무서웠다. 차가 없는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최고 70마일까지 밟았다. 내 속도를 내가 느낄 수.. 더보기
"imagine yourself away from me," 매일의 기도가 고작 멍청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지겹다. 패턴이라니. 일정하다니. 측정이 일상이 될까봐 매순간 두려워서 그랬던 거라고 여전히 변명해보지만, 미지의 파라미터를 얼마나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가 - 그 능력이 제일 관건이겠다. 원하는 그림이 있으면 거기에 가서 닿을 수 있도록 틀과 단계, 체계를 차근차근 세우는 과정. 개별적인 숫자들을 수집하고 그것들로 나의 외부를 조립하여 가설을 무장하는 일. 남들의 의구심을 객관적인 수치로 물리치고 내 작업을 단단하게 방어하는 방법. 나의 수집목록을 신뢰하되 맹신하거나 속아 넘어가지 않는 연습. 그깟 숫자 따위로 남을 속이지 않을 것은 제일 기본적인 약속.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와글와글한 숫자들을 굉장히 자주, 생각한다. 쉬지 않고 유의확률에 유의하고, .. 더보기
너는 우리만의 매일이 외딴 섬 같다고 둘레를 따라가며 웃었지만, 좌초를 자초하지 않았으면, 바란다. 그런데 내 세계는 어쨌거나 내가 자초하니까, 결국에는 좌초하지 않을 것을 허공에다 맹세한다는 건데? 무턱대고? 서사가 빈약하네요. 붕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네요. 과연 나를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 어떤 실험쥐들은 프로토콜에 따라 이산화탄소로 안락사를 시킨다. 살아 움직이던 것들이 단 몇 분 만에 죽어나온다. 그것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숨을 쉬려고 했던 건지 이빨 사이에 모래나 종이 조각 같은 것이 하나씩 끼어있다. 만져보면 아직도 따뜻하잖아, 그게 마음이 좀 그래. 뒷처리를 도와주던 포닥 오빠가 말했다. 아주 바빴던 어느 하루는 저녁도 먹고 세탁기도 돌릴 겸 실험 하나를 마치고 숙소에 들렀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뜨겁게 마른 빨래들을 침대 위에 급한 대.. 더보기
in the parking lot i misread "pay here" as "pray here", 자신의 복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는 애들의 눈빛을 본다. 불운보다는 운에 더 민감한 그런 애들은 마음에 소중함이 질서있게 들어찬다는 것이 어떤 모양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타고난 걸까. 부유富有하되 부유浮游하지 않는 그런 건 어떻게 습득될 수 없는 게 아닐지. 그 어떤 순간에도 굉장히 살아있는 것 같다. 내가 대신 즐겁다. 부디 평생 충만해라. 핸드폰에서 자꾸만 안개 경보가 울리는데 대체 어디의 안개를 이야기하는 건지. 하나도 뿌옇지 않다. 끈질기게 예고되는 두꺼움이 없다. 여기의 여름은 이미 다 끝난 것 같다. 보통 여름이 이렇게 짧냐고 묻자, 여기에서 7년 넘게 살고 있는 애가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원래 이것보다는 좀 더 따뜻해요, 그래도... 왜 좀 더 더워요, 라고 대답하지 않은 걸까. 아직.. 더보기
"tree don't care what the little bird sings," 미국에 5년 동안 있어오면서 사는 곳에 텔레비전이 생긴 건 처음이다. 그래서 몇 주 전부터 숙소에서 자거나, 공부하거나, 책을 읽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종 텔레비전을 켜두기 시작했다. 아침에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면서 곁눈질로 뉴스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는 시덥잖은 만화를 틀어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렇게 집중하며 보고 있지는 않고, 그저 소리와 움직임이 있구나, 정도 생각한다. 조금 전에는 코난 오브라이언 토크쇼가 끝났고 오피스가 시작했다. 생각에 아득해지는 순간이 버겁게 느껴지는 건 뭉게뭉게 뭉치는 생각 가운데에서 만질 수 있는 것들이 딱히 없어서이지 않을까. 나는 천성이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촉각을 맹신하고, 그런 헛믿음에 발을 수 차례 헛딛으면서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게 무엇이.. 더보기
i almost typed "who are you" instead of "how are you", 조금 전 Rss feed로 폴 엘뤼아르 시의 일부를 받았는데 제목 말고는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번역기를 돌렸다: Je n’ai pas pu percerLe mur de mon miroirIl m’a fallu apprendreMot par mot la vieComme on oublie - Paul Éluard, "Je t’aime" I have not been able to break throughThe wall of my mirrorI have had to learnLife word by wordAs we forget - Paul Éluard, "I Love You" 이번 주 초에만 하더라도 하늘이 그렇게 예쁘더니 며칠 갑자기 흐리고 반짝 춥다. 오늘은 반팔에 가디건을 입고 다녔는데 반팔 대신 긴팔을.. 더보기
"'cause you'll be pretty as usual," 도시 특유의 지형 때문에 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꾸로 흘렀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가운데는 불쑥 솟아 있어서 달리는 차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리 너머의 땅이 보이지 않아서 마치 하늘 속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바닷가의 모래는 입자가 곱지만 모래사장 자체는 딱딱해서 사람들은 파도 바로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했다. 나는 나를 잡아끄는 사람들의 손길을 못 이기는 척,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게 하나의 큰 욕조라면 좋겠다. 입 안의 소금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젖은 옷 위에 친구의 티셔츠를 빌려 입고 숙소로 돌아가 씻었더니 졸음이 몰려왔다. 일정이 빡빡해서 학교 본부로 돌아갈 즈음에는 입안이 몽땅 헐어 있었다. 집 앞 주차장에 앉아서 해가 지는 걸 본다. 낮이 짧.. 더보기
"my big dreams walk behind me, they trick, they scheme, they tease," 2년 가까이 일했던 곳에서는 실험실 사정으로 동물 실험을 직접 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로테이션 랩에 들어가자마자 포닥 오빠에게 부탁해서("저 그냥 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가르쳐주시면 될 거에요.") 쥐(마우스)를 올바르게 손에 쥐는 법부터 각종 수술 및 해부를 배웠다. 며칠 전 쥐를 마취시키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오빠가 이제 꽤 능숙해졌네, 하셨다. 습성을 익히니까 이제 좀 알겠지? 네, 동작과 동선이 보여요. 환하지는 않더라도 뻔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습관과 성질이라니요. 어제 오늘 처음으로 동기들을 한자리에서 만났고, 재학생들도 많이 만났다. 학교의 돈자랑(?) 또한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풍족한 게 좋다.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니까 최대한 넉넉하고 걱.. 더보기
내가 아무리 대각선으로 걸어도 측면의 너에게 그건 뻔한 평행이겠지, 금요일 오후 정도 되면 긴장이 풀리면서 집중력이 떨어지고 기분이 느슨해진다. 정신을 차리려고 숨을 참는다. 주말에는 잠을 많이 잔다. 일주일 동안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피곤하고, 아무리 많이 자도 더 잘 수 있을 것 같다. 두세 번 깨면서도 꾸준히 자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없다. 어리둥절하다. 세탁기는 흰 세탁물과 희지 않은 세탁물을 구분해서 일주일에 한 번, 두 대씩 돌리고. 손빨래도 일주일에 한 번. 숙소에서 제공하는 수건을 쓰다보니 세탁물이 생각보다 적다. 예전 아파트에서는 세탁기 한 대당 쿼터가 여섯 개 필요했는데 여긴 쿼터 세 개면 된다. 대신에, 세탁과 같은 빈도로 방 청소를 부탁하는 메이드에게 팁을 남긴다. 오늘은 메이드 서비스 팻말을 문에 걸어두고 점심 약속에 나갔다가 오.. 더보기
"in a matter of time, it would slip from my mind," 분명 비가 잦아든 틈을 타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는데, 절반쯤 왔을 때 또 비가 쏟아졌다. 몸의 절반 이상이 비에 흠뻑 젖었다. 우산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쩔 줄 몰라하며 실험실에 들어갔더니 동갑내기 랩텍은 빗물을 뚝뚝 흘리는 나를 보고 껄껄 웃고는 병원 근처 대학의 북스토어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급하게 산 트레이닝 바지는 남자용이라 그런지 제일 작은 사이즈였는데도 컸다. 하루 정도 입어보고 불편하면 나중에 환불하려고, 가격표도 떼지 않고 허리와 바지 밑단을 접어서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병원 분위기가 좀 보수적이다보니 자꾸 눈치가 보였다. 입학 면접 이후로 처음 뵙는 교수님은 악수를 청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잠옷을 입고 오면 어떡해요? 교수님, 이건 잠옷이 아니구요... .. 더보기
"i lie awake, dreaming of the landscapes in the rain," 각종 학교 서류를 처리하고, 모르는 도시에서 무턱대고 모르는 버스에 올라 관공서에 다녀오고, 첫 로테이션 연구실을 정하고, 며칠 머뭇대다가 숙소 계약을 연장하고. 그러면서 생애 최악의 시차증후군을 겪었다. 그래도 이제 건강보험만 고르면 내가 혼자 알아서 해야 할 것들은 다 끝난다. 정착의 초반이 이렇게 지난다. 나는 이렇게 지낸다. 지내는 곳 특성상 부엌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이 아쉽다. 물론 모든 걸 누릴 순 없겠지만, 요리해먹던 세월이 몇 년째이다보니 아쉬움을 쉬이 숨길 수 없네. 그 와중에,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불편해서 어떻게 그러고 사냐(여자)', 또는 '어차피 몇 달 안 있을 거니 그냥 밥 사먹고 지내라(남자)', 성별에 따라 양분되는 양상이 신기하다. 며칠 전 아는 분의 도움으로 .. 더보기
지내다보면 지날 수 있는 이런 이야기의 방식을 설명 대신 약속해, 미국을 떠나던 비행기에서 잠이 오지 않던 나는 머리 위의 독서등을 켰고 굉장히 오랜만에 김경주 시집을 열자 펼쳐든 페이지에서 "처음으로 내가 입에 담배를 물려 준 여자가 있습니다" -라는 낯익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고 순간 나는 늦은 오후와 저녁과 한밤과 새벽과 하루를 통과해 봄비가 내려 옅은 흙냄새가 나던 이른 아침 공기 거기에 젖어들던 담배 냄새 그것들과 함께 동이 트던 공원 옆길 거기에서 조깅하고 있던 내가 모르는 사람들 혹은 내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피곤한 체온들 역시나 끌어안던 빈 어깨들 내 방을 벗어난 사거리와 고속도로와 주차장과 공항의 마지막을 순서대로 생각하다가 이제부터라도 조금은, 흐르는 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다짐하고는 비행기 특유의 소음을 못 이긴 척 .. 더보기
구름은 두껍고 어둡게 내 방은 밝고 환하게 너는 멀리서 아름답게, 아주 예전부터 줄곧 생각해왔다, 잠드는 과정sleep 없이 잠들어 있을asleep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촛불이 입김 앞에서 순식간에 꺼지는 것처럼. 잠들어 있는 건 좋다. 수면의 길이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온전한 나라. 태초부터 나의 내부에 있었던 공간이다. 나 하나만으로도 동서남북이 가득해진다. 아늑하다. 누가 굳이 나를 떠밀지 않아도 거기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잠에 입국하는 건 너무, 번거로워. 거의 껄끄러울 정도다. 의식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모든 통로가 거칠다. 마치 입자가 굵은 구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식도 없이 비가 내리면 좋겠다. 내 침실이 넘치도록. 한낮의 더위가 빗물에 미끄러지듯 사정없이 잠에 빠지고 싶다. 오늘도 잘 자고 내일도 잘 일어나. 너도. 보고 싶어. 나.. 더보기
내 손에 있는 모든 잔상처의 역사는 세상에서 너만 알아, 공연을 보는 내내 등이 더워서 기분이 좋았다.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이 어두웠고 날이 선선해져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걷다가 결국 버스를 한참 타고 번화가로 갔다. 시간이 애매했다. 밥집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어서 길에서 조금 헤매다 어떤 술집에 들어갔다. 가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식사를 하던 종업원이 주문을 받았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서 작년에 함께 봤던 영화 이야기를 했다. 네가 말했다. 그때 그 여자 남자친구가 여자더러 꼬마애와 자기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닦달했더니, 여자가 꼬마애를 고르잖아, 뜬금없이. 그러면 남자는 차에서 내리고. 그 부분이 난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말했다, 또는 말하고 싶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내가 제일 처음 접했던 다.. 더보기
미분 가능하면 연속이라지만 영속은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나는 이 습득을 원한 적이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받은 새 데빗카드를 찾으려고, 잡다한 서류를 모아둔 꾸러미를 열심히 뒤지다가 몇 년에 걸쳐 모은 카드와 편지 묶음을 찾았다. 생일 축하 카드가 제일 많았고 졸업 축하 카드, 친구들이 여행 가서 보내온 카드, 그동안 고마웠다는 카드, 그냥 네가 생각나서 썼다는 카드 등등 여러가지가 섞여 있었다. 그 묶음에는 내가 오며가며 사두고 미처 쓰지 못한 카드도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카드를 보자마자 문득 예전에 방을 같이 썼던 애 생각이 나서. 그래서 곧 있을 졸업도 축하할 겸 책상에 앉아 바로 카드를 썼다. 펜에서 잉크가 새어나와서 손이 더러워졌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과 졸업식을 지켜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도 옛날 이야기를 적었다. 그랬더.. 더보기
"it hurts to breath around you, my lungs fill up with sea," 미국에서 쓰던 노트북에 맞는 어댑터가 없어서 코첼라에서 찍었던 사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찍었던 사진도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나는 뭐든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아빠 엄마는 정리왕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정리정돈 및 청소를 제일 잘한다. 내가 만지는 내 주변은 아빠 엄마의 정리의 정의에서 약간 벗어난다. 내가 늘어놓는 물건들에도 나름의 순서와 질서가 있지만 그게 모든 사람들의 기준에는 들어맞지 않으니까, 타협이 필요하다. 한국에 돌아와 며칠 동안 물가(부산항, 광안리, 이기대, 우도, 비양도, 협재, 해안도로, 쇠소깍, 용두암 근처)를 집중적으로 맴돌았더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직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신발.. 더보기
2012년 9월 28일 금요일 선택은 드물게 찾아왔고, 그럴 때면 나는 입에 대본 적도 없는 담배를 찾고 싶어졌다. 강요하듯 지켜보고 있을 눈(들)을 생각하면 안개를 삼킨 것처럼 한마디도 뱉을 수 없는 입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헛기침을 하면 그제야 내 호흡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낡은 피를 흘리는 심정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보면 종국에는 입맛이 썼다. 입가에 붉게 침이 고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다가 손등마저 붉어지면 그제야 입맞춘지 꽤 되었음을 상기하고, 아무도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도 깨닫지. 그건 번민이라 불러야 했지만 나는 그 노을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너도 소실점을 향해 가듯 나를 사랑해주리라 몰래 소망했고, 너는 내가 아무런 단서와 방편 그리고 계획 없이 그.. 더보기
네가 나의 여전한 시간을 본다 말할 때 문득 뭉쳐오는 간격이 있어, Mindlessly, I went to watch a movie with you. I can't really recall any of our conversation on our way. My phone buzzed in my pocket. This guy who spotted you and me from a distance was half-jokingly asking me if we were dating. I texted him back: No. You complained about overpriced movie tickets. We sat in the darkness for a while. The screen lit up like a nightlight. I sank deep down in my sea.. 더보기
너는 오늘 아침 당장 꽃 피어도 내 하루의 어느 한 곳은 여태 겨울이야, 주말에 폭설이 온다길래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잠들락말락 깜빡이던 토요일 새벽부터 얼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나더니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블라인드를 제치고 밖을 내다보자 정말로 꽤 많은 양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겨울이었다. 새들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발은 거세어졌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갑자기 몰려오는 피곤에 코트도 목도리도 벗지 않고 거실 소파에 쓰러져서 그대로 낮잠을 잤는데, 두 시간 정도 자다가 눈을 뜨자 창밖으로 온통 하얀 풍경이 보였다. 한동안 그렇게 쇼파에 엎드려서 멍청하게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았다. 플로리다에 가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이상 겨울이 되어도 눈 구경할 일이 없을 텐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벌떡 일어나, 일주.. 더보기
"we're in a natural spring, with this gentle sting between us," 지난 여름 의대 전철역에서 자꾸만 마주치던 친구가 있었다. 친분이 두터운 친구는 아니지만 같이 수업 들은 적도 있고 해서 만나면 서로에게 안부 정도 묻는 친구인데 그 여름에는 하도 자주 마주쳐서, 이것도 인연이니 함께 날을 잡아 밥을 먹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퇴근하고 의대 근처 술집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요즘 뭐하냐고 묻는 나에게 걔는,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아서 낮에는 의대에서 일하고 밤에는 의대 원서를 준비한다고 했다. 외국인으로 여기 의대 문을 뚫기가 힘들 법도 한데 웃으면서 준비가 잘 되어간다고 했다. 평소 지켜본 바에 의하면 워낙 열심히 살던 애라 그럴 만도 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학에 온 이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놀라서 물었다. 나도 집에 자주 가는 편은 .. 더보기
"you're insignificant, a small piece, an ism, no more no less," 내가 내 글에서 '생각하다'라는 동사를 얼마나 자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메스껍다. 예전부터 운명의 영향력과 의지의 영향력을 각각 절반씩 믿어왔다. 여전히 유효한 이 믿음의 구조는 유전자의 영향력과 환경의 영향력을 믿는 태도와 병렬을 이룬다. 의지의 역량은 무한하지만 운명 또한 내 삶에 분명한 테두리를 긋고 있음을 안다. 테두리가 허락한 범위는 절망적일 정도가 아니라 억울함이 없다. 운명과 의지의 접점은 늘 적당한 만큼만 흥미롭다. 가끔 흔들리고 있어도 지나고 보면 쉽게 납득하게 되는 형태다. 과학적인 믿음은 없다. 믿음을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믿음은 믿음의 믿음성(~ness)을 조금씩 잃고 천천히 퇴색한다. 더 나아가, 누군가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게 되는 순간 그 믿음은 더는 믿음이 아니게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