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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eves Like Us - Shyness /


마일드한 수면 장애를 겪는 것 같아서 침대에 앉아 오랜만에 카시오톤이나 뚱땅거릴까 잠시 고민하다가 작년 8월 이후로 건드리지도 않은 베일리스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마침 딱 한 잔만큼이 남아 있어서 우유에 타 마셨다. 우유는 사실 로레인껀데. 마시면서 박찬서 생각을 했다. 박찬서는 주량이 꽤 되기 때문이다. 박찬서는 나에게 취한 모습을 한 번밖에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그것도 내가 어색한 사람과 택시 뒷좌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을 때). 박찬서는 지난 가을 영화를 찍으며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박찬서는 지난 달 내가 자기 집에 놀러갈 때 어머니께 뭐 사다드리지,라고 물었더니 자기가 먹고 싶은 술 이름을 대며 그걸 사오면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과일주... 철현이 생일날 갔던 서면의 한 술집에서 그 술은 꽤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나는 메뉴판을 보면서 또 박찬서 생각을 했었지.

여튼 그렇게, 박찬서 생각을 좀 했다. 그랬더니 자연스레 서울 생각이 났다. 내가 언제쯤이면 그곳을 고른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을지를 계산했다. 그러다가 침대가 너무 넓지 않나 생각했고. 옆에 사람이 있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로레인 옆에서 자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감기 걸린 Genna가 일찍이 로레인 옆에서 자고 싶어 했지만 거절당해서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로레인 옆에서 잔 걸 Genna가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당연히 토라지잖아. 결국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이 들 때까지 이언 맥큐언Ian McEwan의 소설을 적적하게 읽었다. 읽으면서 잠들지 못하고 책을 끝내게 될까 무서웠다.

그러나 잤다. 썩 많이 잔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잘 잤다. 잘 잤는데, 잘 잤긴 한데 이상한 꿈을 꿨다. 제일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선의 뿌리가 뽑히는 장면. 그 광경 앞에서 난 왠지 울 것 같았다. 구역질처럼 솟는 울음을 참고 선을 다시 화분에 꽂아보다가 가시 때문에 손을 다쳤다. 얇고 촘촘한 가시에 엄지를 찔리면서 아프다고 생각했다. 꿈이지만 꿈임을 인지하지 못했으므로. 피는 안 났지만. 화분을 들고 부엌 싱크대로 가서 수도꼭지를 열고 흙을 물로 한참 적셨다. 선이 자꾸만 쓰러질 것 같아서 나는 꾸역꾸역 선을 흙에 꽂았다. 화분 밑으로 촉촉한 뿌리가 송송 나오는 걸 보았다. 물방울이 맺혀있었고.

(침대는 퀸사이즈인데, 나를 세 명 눕힐 수 있는 크기인데 난 항상 가장자리에 매달려서 잔다. 떨어질 것 같지 않냐고 물었지.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을까 싶어서 그랬던 건데. 아니 그보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내가 도망가다 굴러 떨어질 것 같기라도 하면 직전에 내 어깨를 잡아당겨 나를 안아 주게? 나를 끌어안을 거야? 그러면 우리는 결국에야 그렇게 서로를 온전히 붙들고 잠이 드나? 자꾸만 전화가 오고 사람들이 말을 걸고)

그리고 깼다. 잠에서 깨자마자는 꿈을 기억하지 못한채 이상한 기분의 잔여만을 안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으로 누워있었다. 자세를 바꾸다가 창가의 선을 보고, 그제야 기억이 나기 시작해서 잠시 놀랐다가 선의 멀쩡한 꼴을 보고 이내 진정하고. 
그런데 선인장 뿌리가 원래 그렇게 생겼나, 꿈에서 본 것처럼? 사실 화분을 처음 선물받을 때도 가시에 찔렸었는데, 방금 그 꿈은 그때의 재생이었던 걸까? 헷갈려서 샤워를 했다. 음악이 수증기에 섞였고, 나는 부엌으로 가서 얼린 밥을 데워 도시락을 쌌다.

그냥 그랬다. 살짝 서글펐던 마음은 곧 상승곡선을 탔다. 실험실에 갔더니 새 컴퓨터가 생겨서 신났었고 점심 시간에는 박사님이 오늘 일 많이 시키실 거라며 생선 튀긴 걸 밥 위에 올려주셔서 신났었고(개강 이후 첫 해산물이라니) 저녁 즈음에는 내 프로젝트가 생겨서 신났었거든. 사실 마지막 부분을 제일 신나했어야 하지만 그때 난 표시 안나게 지쳐있었고. 더 신난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체력이 벌써 바닥이야? 그런데 잠드는 건 왜 이렇게 힘들어? 어쨌든 다시 하강.

그러니까... 내 난처함이 귀엽다며 웃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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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dd Rundgren - A Dream Goes on Forever /


후배가 성당으로 차를 몰며 오늘은 최고기온이 섭씨 12도라고 해서 굉장히 신났었는데 그것도 잠깐이었고, 종일 추워서 안에서나 밖에서나 계속 떨었다. 바람만 안 불어도 나을 것 같은데. 여름보다는 그래도 겨울이 좋다고 내가 그랬지. 벗는 건 한계가 있어도 입는 건 다소 한계가 없는, 그런 당연한 이유도 있지만 일단 몸이 더워지고 목과 얼굴이 뜨거워지면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니까. 이제는 겨울이 나은 건지 확신이 안 서. 조금은 낮아지고 있나 생각해(이건 "나아지고"의 오타가 아니야). 이미 오래 전에 임계점을 지난 걸지도 모르지. 후배는 오늘 주기도문 외울 때 내 손을 잡고는 언니 손 참 따뜻하네요, 했어. 그런데 나는 사실 오늘따라 유독 길었던 미사 내내 손이 시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은 의아해져서 나도 모를 표정을 짓고.

가끔 나는 내 표정이 궁금해, 그래서 누운 채로 거울을 들고 나를 들여다본 적도 있어. 표정은 잘 모르겠고 내가 그냥, 있었어. 그야말로 그냥 있었어(이걸 어떤 언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지). 작년 가을 언젠가 도서관 앞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그날따라 날씨가 좋아서 나는 나무 그림자를 보고 있었는데 모르는 여자애가 지나가다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우냐고 물었어.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애는 나를 정면으로 보고는 웃더니, 내가 너무 우두커니 있어서 우는 줄 알았다며 사과했고. 내가 정말 울고 있었다고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그리고 몇 주 후 친구 집에서 그애를 만났다. 이제는 가볍게 인사하는 사이가 됐어.

비슷한 모양으로 그저께도 난 친구 집에 있었고, 오랜만인 떠들썩함과 남들의 흥청망청에 나도 신나서 벽에 기대어 그 소란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게 또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었어. 무슨 걱정하냐고. 아닌데,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시선은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 그러는 네가 걱정있는 건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고. 어두워서 나는 내 표정을 모르고. 하지만 나도, 나 혼자만으로도 소란해. 아주 많이. 꼭 그 소란 속에 있어야만 소란한 건 아니지 않나.

울었던 적. 내가 그때 끝내 막차를 타고 집에 가다가 고개를 숙이고 조금 더 울었던 건 가방 속 시집의 접힌 귀퉁이를 열었을 때 그날 오전에 읽었던 "…나는 미안했고 / 미안한 것만으로 나날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이성복)"라는 구절이 나와서였던 것도 맞는데,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도 잘 살 수 있으니까 괜히 양심이 상해서 그런 것도 맞긴 한데, 그런데 아마도 그게 전부는 아니겠고 더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 불쌍한 것 같아서(나는 귀가 얇으니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아니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도 떠들지 않는 지하철 안에서 난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줄곧 아랫입술 안쪽을 씹었다는 것, 그래 그거 하나는 확실하고 심지어 아직까지도 입 안이 살짝 너덜너덜해, 꼭 그 때문인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쓰고 보니 이건 필요 이상으로 긴 문장이야.

그러나 냉정하게 말할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자세교정 정도야. 등이 아파. 드물게 손끝이 저릴 때마다 많이 무서워, 그보다 더 드물게 부정맥이 올 때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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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are my confessions on a street corner bent shattered and pr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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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ami Horror - Sometimes /


도착한 날 밤에는 비와 우박과 천둥과 번개 같은 것들이 달려나왔고 급기야 토네이도 경보도 두 번 울렸다. 나는 시차 때문에 뜬눈으로 이불 아래서 뒤척이다가 두 번째 경보에 일어나 지하실로 내려갔고, 어둠 속에서 경보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토네이도가 집을 뚫고 전진하는 상상을 했다. 내 방으로 다시 올라갔을 때는 새벽 세 시였다. 다시 누웠는데, 무서웠다. 개강날에는 다들 날씨 얘기였다. Chelsea는 울었다고 했고 성우는 우박 소리를 들으며 그냥 잤다고 했다. 내가 이 학교에서 본 철학 교수 중 가장 예쁜 여교수가 환하게 웃으며 날씨 별로 나쁘지 않다고 말했고 다들 말이 없을 때 교수와 안면이 있는 친구는 내 옆에서 저 교수 위스콘신 출신이라며 키득거렸다.

한 달 동안 버려졌던 방은 너무 넓고 춥고 물건들로 넘친다. 훈기를 불어넣고 싶은데 혼자서는 힘이 든다.




마지막 학기라 부/전공과 무관하면서도 재미있는 수업을 하나 정도는 듣고 싶어서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과 세계의 예술 영화Global Art Cinema 중에 고민하다 후자를 듣기로 했다. 사실 예상보다 몹시 망설였는데, 개강날부터 있었던 스크리닝에 갔더니 다수에게서 '척' 할 것 같은pretentious 분위기가 물씬 풍겨서였다. 생리적 경멸이 끓으려는 걸 삼키듯 참았다. 원래 이런 건가, 지난 번 수업은 괜찮았는데. 시나리오 수업에 들어가지 못해 슬퍼하고 있던, 안면이 있는 소포모어를 내가 듣는 수업으로 오라고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으므로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상부상조.

시차적응이 덜 되어서 자꾸만 꿈을 꾼다. 꿈은 진짜 같고 꿈이 아닌 것이 가짜 같다. 감기약을 과다복용한 것처럼 몽롱한 상태로 고르지 않은 숨을 내쉬며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는 것이다. 어제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다가 북쪽으로 끌려가는 이상한 꿈을 꾸고는 놀라서 깼다. 나는 여름에 들어야할 것만 같은 노래들만 계속 듣다가, 거칠어지는 손등에 치덕치덕 로션을 바른다.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내 뒤에는 살얼음과 나뭇가지 그리고 페인트가 벗겨진 바닥, 뭐 그런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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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ith Canisius - Far From /


머리를 생각보다 짧게 잘랐다. 나쁘지 않다. 목 주변이 추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리는 어차피 빨리 자란다. 언젠가는 앞머리를 다시 내고 뒷머리는 아주 짧게 커트해서 탈색을 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어울릴 건 둘째치고 호적이 파일까?

이렇게나 따뜻한 부산에서 사람들은 자기 몸집만한 패딩을 입고 다닌다. 다들 몸이 차가운 건지. 며칠 일찍 출국한 후배가 세인트루이스의 기온이 하루만에 화씨 55도에서 1도로 내려갔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어떤 옷을 입고 비행기에서 내려야 할지 가늠할 수 없다. 언제 부산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이 있고 산이 있는 아름다운 나의 도시, 다음에 귀국할 때에는 또 다른 것들이 달라져 있겠지. 대학원은 꼭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 이번 방학처럼 떠나기 싫은 적도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마지막 학기가 시작하고 나면 나는 순간마다 부산을 잊을 것이며 비행기를 타기 싫은 마음에 여기를 조금은 덜 그리워할 거다(나이 한 살 더 먹는 걸 억지로 어떻게 정의내려 보자면 내가 먼저 밀물처럼 그리워해도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 일일까). 자야겠다. 내일은 시간을 거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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