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몰입하는 만큼 당신(들)도 당신(들)에게 몰입해줬으면 좋겠다.
한국에는 폭설이 왔다는데 여기는 아직도 너무 포근하다. 지난 주말 이후로 조금씩 추워질 거라더니 거짓말이었던 건지. 오늘은 퇴근하면서 땀이 나길래 코트를 벗어 손에 들고 걸었다. 오히려 아침보다 더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대학에 오기 이전의 세월 대부분을 아열대 지방에서 보낸 친구는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이런 가을 같은 날씨에 반색하다가도, 안 추워서 좋긴 한데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네... 운전을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다고? 응, 12월인데 왜 이렇게 따뜻하지? 전에 말했잖아, 지구 멸망한다니까. 마야력 말하는 거지, 언제였지 그게? 글쎄, 21일인가. 음. 엇, 그러고 보니까 그날 너 한국 가는 날 아니야? 응. 이런, 너 하필 공중에서 멸망을 맞겠네. 크크, 그런가, 막, 나 하늘 날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는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쿠구구구궁- 우리는 이런 섬뜩한 이야기를 하며 출근을 했다.
시카고는 그래도 여기보다는 춥겠지.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네 개 정도 잡았다. 부산에서 서울에 갈 때도 누구누구 만나서 놀고 밥 먹고 마실 거니까 언제부터 언제까지 서울에 있자, 정하고 상경한다기보다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서울에 가 있을 테니까 그때 괜찮은 사람들 만나서 놀고 밥 먹고 마시자, 뭐 만날 사람 없으면 나 혼자 돌아다니고, 이런 순서를 밟는데 시카고에 갈 때에도 비슷한 모양이다. 식사시간 위주로 약속을 잡았고 뭐 딱히 관광할 계획도 없어서 약속 중간에 투표도 하러 갈 생각인데, 그럴 생각이었는데, 글쎄. 투표 1일차 256명의 유권자분들이 투표권을 행사해주셨다며 미중서부 동포 여러분, 투표에 꼭 참여해주십사 부탁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
학기말이라 학부생들이 실험실에 나오는 빈도가 줄고 있다. 지난 주, 시험이 많다며 내게 양해를 구하고 이번 주 내내 실험실에 나오지 않은 학부생 한 명은 오늘 후배들과 식당에서 저녁 먹고 있는 나를 식당 유리창 너머로 발견하곤 식당 유리문을 슬그머니 열고 들어와 씩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내일은 실험실 갈게, 하면서. 너도 내일을 마지막으로 내년에 보겠네. 다들 나를 남기고 집으로 간다. 겨울 이맘때 한국 갈 생각에 들떠 있기를 몇 년 반복했더니 올해는 뭔가 허전하다. 그래도 내년 봄이 되면, 날이 따뜻할 때 한국 가는 일에 생경하게 기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잘 왔어, 이 계절에 한국이라니 어쩐 일이야, 하면서 나에게 밥을 사주시면 됩니다... 맛깔나게 먹어드릴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