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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고작의 소나기에도 방주를 타는 철 지난 습관이 있네











차 오일을 바꾸러 오토샵에 들렀다가 에어 필터에 브레이크 패드와 로터까지 갈고 나왔다. 두 시간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순식간에 거지 됐네 나 그냥 죽어야겠다, 엄살 부리니 땀이 다음 주 여행은 해야지, 했다. 요새 여행이 퍽 잦다. 어딜 그렇게 자꾸만 가니? 엄마가 묻는다. 그렇지만 나 어디론가 자꾸만 가지 않으면


천둥번개에 몇 번 잠 깨고 나니 맑고 선선한 봄날의 연속이다. 주초부터 미팅 발표를 하고, 많이들 이미 퇴근한 시간에 랩에 남아 시퀀싱을 셋업하고 있었는데 테크니션 한 분이 오늘 발표 좋았다고, 시작과 끝을 정해놓는 기분이 썩 좋지 않더냐고 물었다. 끝이 있다고 상상해본 거에요, 상상하는 일은 즐겁잖아요. 왠지 멋쩍어져서 그렇게 대충 하하 웃어 넘겼다. 그 분은 가방을 둘러매고 퇴근을 했고 나도 기계를 돌려두고 똑같이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플레이트를 꺼내려 기계 문을 열었더니 내 플레이트 아래에 남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너 대체 어제 언제까지 일한 거야, 나 퇴근하기 전에 일 다 끝냈던 거 아니었어? 그는 추궁하지 말라며 웃어버릴 뿐


그 날은 꽃가루 알러지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어서 일하다 말고 오피스로 내려가 약을 먹었다. 그 때문인지 퇴근해서 밥 먹자마자 쓰러져서 열한 시간을 잤다. 거실과 침실, 장소를 옮겨 가며 억울한 일 있는 사람처럼 계속 잤다. 자면서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깨고 나니 오른손 검지가 아파서 손을 쓸 때마다 자꾸만 주춤한다. 엉거주춤 웅크린 손가락에 자꾸만 뽀뽀를 해온다. 너는 내가 너처럼 미쳤으면 좋겠지? 그래서 자꾸 이러는 거지? 엉망이던 그때의 나를 지금의 네가 봤더라면 지금의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진 않았겠지만 그때의 나를 목격하는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라 그때의 너였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멈출 겨를도 없이 생각을 끝내버리니 아뿔싸 나 이제 더는 갖다댈 변명이 없다.


자주 심심하지만, 외로움은 잘 타지 않는다. 이인분의 음식을 만드느라 물을 끓이며 냉동채소팩 뒷면의 글씨를 읽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더 중요하게도, 이것이 네 마음을 아프게 하니? 너무 다정해버리면 나는 그럴 자신이 없어서 덜컥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그건 중요한 문제지? 그러니까 서로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는 듯 순간 재채기를 하고


바닷가 그룹 조깅을 갔다가 샤워를 한 뒤 차를 몰고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조는 대문을 열자마자 내 어깨 너머로 야옹아 거기서 뭐해, 했고 뒤를 돌아보자 오렌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주눅 든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집 필요하니? 조는 그렇게 묻더니, 너 고양이 안 좋아하지 않냐는 내 말에 대답도 않고 집에 다시 뛰어 들어가서 그릭 요거트를 들고 맨발로 뛰쳐나왔다. 고양이가 그릭 요거트도 먹나? 유제품이니까 먹지 않을까... 나는 마침 늦은 저녁거리로 피타핏에서 유로 샌드위치를 사왔기 때문에, 양고기를 조금 뜯어 요거트 옆에 내려놓았다. 고양이는 음식 냄새를 맡고 우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뒷걸음질쳐 떠나버렸다. 남겨진 우리는 집으로 들어가 자몽맛 맥주를 마시며 티비를 봤고, 깔깔대다가 빠르게 잠이 들었다. 잠이 조금 깬 나는 잠이 덜 깬 조를 흔들어 깨워 문단속 하라고 일러두고 집을 나섰다. 주차장을 빠져 나가다가 그 고양이와 다시 마주쳤다. 꿈인가 싶었다. 다음 날 조는 간밤 우리가 그렇게 둔 음식이 조금 없어졌더라며, 그런데 요거트는 조금 밖에 안 먹었더라! 요거트가 레몬맛이어서 고양이한테는 좀 새그러웠나봐, 그렇게 말했다. 너 고양이 안 좋아하잖아, 나는 그렇게 한 번 더 물으려다 얼버무리고 물을 마시고


그렇다고 난 억지로 외로울 수도 없는데. 나의 이걸 끝낼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이 시간을 정물화처럼 가만 두어도 괜찮겠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오래된 게으름에 그렇게 대충 믿어버린다. 커피를 끓여서 거실로 나오면 고장이 나서 절반도 열리지 않는 커튼 사이로 아침해가 쏟아진다. 그런 시간에 그런 각도로, 나의 집에 빛이 들어오는 고마운 절기.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나의 둘레를 한바퀴 돌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잊지 마. 얼굴에 온통 잠처럼 햇볕 묻었길래 소매로 닦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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