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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얼리고 싶은 시간들이 많이 생겼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 Phantogram - Nightlife /


얼리고 싶은 시간들이 많이 생겼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어보니 시금치가 시들해져 있길래, 대충 데치고 급하게 시금치무침을 만들었다.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심심한 나물반찬. 샐러드용 아기시금치라 얼마 만들지도 못했다. 냄비를 씻고 있는데, 자기 식사를 준비하던 로레인이 장조림을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다음에 달걀 사오면 만들게, 했다.

냉동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기어코 냉동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때, 그런 말을 들었다. 네가 끝도 없이 안이하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 알겠니, 이 어린 아이야(하지만 우린 나이가 같잖아, 라고 항변하지 못했다), 순진한 건지 어린 건지, 다들 너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구, 왜 그걸 모르니, 착하게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야. 소음을 뚫고 네가 말했고, 나는 너를 마주할 수 없었다. 일어날 수는 없어서 고개를 들지 않고 밥만 먹었다. 밥은 맛있었고,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들 식사하느라 바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내가 자의적 동기 대신 어떤 부채감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스무 살이 된 직후에는 한동안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어른들이 아닌 사람들로 보이는 데에서 비롯된 괴리감을 앓았다. 몇 년이 지났다. 지금의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숫자의 나이를 살고 있다. 올해는 어쩐지 통각痛覺이 무디어져서 나는 무슨 일에 어떻게 호들갑을 떨다가도 돌아앉으면 금세 그렇구나, 한다. 언제부턴가 어느 정도의 체념이 익숙해진 삶이다. 내 피부만이 감각의 부재에서 오롯이 살아남아 나를 대신해 작은 압력에도 과민반응한다. 손톱에 긁힌 자국 그대로 벌겋고 선명하게 붓는다. 내 살의 그런 양각을 보며 왜 이러니, 아픈 거니, 묻는다. 대답은 없다. 사실 이 알러지도 딱히 통증을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에게서 아픔이 사라진 건지도 모른다. 그저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을 느낀다(이이체)."

다만 우리 사이에 위치한 신뢰의 선을 밟고 있는 것이 나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제일, 견디기 힘들다. 아직도.

그러나 나는 어차피 네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니까. 너는 몹시 흡족하고, 돌아선 나의 밭만 혼란하다. 이러다가 나는 벌받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어떤 계시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