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ent - 747 /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 신호등을 지나면서부터 Kent의 747을 들었는데 도입부에서 올려다 본 달은 손톱처럼 가늘고 창백했다. 해가 막 지려던 참이라 하늘은 보라색과 분홍색의 중간이었는데 달 아래에 그어진 비행운은 붉게 예뻤다. 도서관에 도착해 문을 열 때 마침 노래가 끝이 났고 그 덕에 나는 꼬박 7분 47초를 걸었음을 알았다. 이건 그저께의 일. 747을 듣기 시작한 건 지난 주에, 티볼리에서 다르덴 형제Dardenne의 <The Kid with a Bike>를 보고 학교로 돌아가 늦은 저녁을 먹을 때 진석이가 그 노래를 가르쳐 준 이후, 다소 습관적으로. Kent의 열번째 앨범이 나온 건 오늘. 어제 오후에 이어서 오늘 아침에는 대학에서의 마지막 in-class 시험을 봤고. 금요일은 수업이 없으니까 내일은 대학에서의 마지막 수업날.
감기가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지 주말 동안 굉장히 앓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여서 끙끙대다가, 수건을 물에 흠뻑 적셔서 코 밑에 대고 겨우 숨을 쉬다가 잠이 들었다. 옛날에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해주셨던 게 기억이 나서. 친구들은 자꾸 코데인을 처방 받으라고 했다. 그렇지만 학교 보건소까지 갈 시간적 여유도 심적 여유도 없었다. 대신 지영 언니가 작년 여름 우리 집에 두고 간 항생제를, 예진이한테 받은 약과 같이 먹었더니 많이 나았다. 기침만 좀 더 줄면 좋겠다.
기침 때문에 도서관 내부에서 공부하기는 아무래도 미안하고 집에 있으면 기분과 생활이 - 지금처럼 - 쳐지기만 해서 도서관 카페로 공부하는 주 위치를 옮겼는데 그러다 보니 오가는 사람들과 자주 이야기하게 된다. 어제는 평소 많은 얘기를 해본 적 없는 애의 걱정을 들었다. 나는 제대로 쳐다보려고 했는데 자꾸만 시선이 비껴갔다. 누구나의 삶이다. 그애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꾸만 전, 쓰레기에요, 했다. 그래도 나는 네 멘탈이 부럽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애가 떠나고 몇시간 후 잘 모르는 같은 반 친구가 내 옆에 앉으며, 자기가 그동안 수업을 안 가서 하나도 모르겠으니 시험 공부를 도와달라는데 내 상황도 걔 상황도 도무지 답이 없었다. 다만 미래가 확정된 것에 대한 그애의 막연한 넋놓음이 부담스럽고 낯설어서 숨이 막혀와, 나는 경황도 없이 가방을 챙겨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넋을 놓으면 안 되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정말 안 되나? 그런 건 누가 정해 놓았지? 오늘 새벽, Genna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 핸드폰을 보니 어젯밤 내가 집에 걸어오며 예진이에게 정신 없이 보낸 문자들이 잔뜩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대답들, 미안해, 얼마나 놀랐을까. 사람은 가장자리로 밀리면 솔직해진다. 그때 내가, 별 소통도 없이 간파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느슨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를 보던 마음대로 안 될 걸요,하는 눈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이 많은 걸 그애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나는 사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