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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며칠 전부터 날씨가 놀랍도록 선선해서 다들 기뻐하면서도




/ 못 - 서울은 흐림 /


며칠 전부터 날씨가 놀랍도록 선선해서 다들 기뻐하면서도 당황하고 있다. 날씨가 좋으면 불안해져야 하는 심리라니, 불공평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은 춥기까지 했다. 내일은 애들이 놀러 오는 날이다. 며칠 동안 이 날씨가 지속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여기 날씨란 게 또 워낙 모르는 일이다. 오늘도 날씨 좋은 와중에 구름이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뉴스를 읽다가 느낀 엄청난 혼란에, 참지 못하고 Chelsea 집으로 달려갔던 몇 주 전을 기억한다. 그때는 내 객관이 얼마나 주관이며 내 주관이 어디까지 객관일 수 있는지 남의 입을 통해서라도 알아야만 했다. Chelsea는 내 객관도 주관이고 내 주관도 객관이라는 듯 애매모호하게 나를 달랬고, 나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안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더랬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책을 느리게 읽고 있다. 윤리에 대한 다소 생소한 고찰. 내가 혼란스러워했던 부분들이 그나마 조금씩 명확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분에 불과하니까,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먹고, 자고, 읽어라. 학교 뒷골목의 책방 벽에는 이런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었다. 이게 정답인데, 말이다. 학기가 시작되면 이 짓도 못 하겠지. 이 책방에는, 사실 얼마 전에 처음 들어가 보았다. 규모가 작고 구비된 책도 많지 않지만 책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섬세하게 골라다 놓은 책들뿐이다. 양보다는 질이라는 건가. 어제는 거기에서 작은 책 한 권을 충동적으로 샀다. 책장에는 수화가 보내준 책들이 쌓여있다. 책이 허영이 되어갈까 겁이 난다. 이것도 습관이다.

현미경 작업이 오늘로 끝이 났다. 마흔일곱 개의 슬라이드를 확인하고 수천 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난시가 심해졌고 허리가 안 좋아졌으며 목 근육도 나빠졌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를 닮아간다. 결가부좌를 틀면 허리가 곧아진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현미경 앞에서 나는 수시로 참선 자세를 취했다. 결가부좌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의자가 작아서 몹시 불편했다. 어쨌든 끝났다. 자료 분석이 남아있지만 그건 주말이 지나면 천천히 생각하고 싶다. 현미경을 보면서 잊고 있던 음악을 참 많이 들었다. 악틱 몽키즈Arctic Monkeys는, 난 아무래도 2집이 제일 좋다. 오브 몬트리얼Of Montreal 노래들은 하나같이 참 시적이다, 혹은 시각적이던지. 못 3집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넬이 그립다.

왼쪽 입술 안의 구멍이 커져만 간다. 남들은 못 보겠지만 나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