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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다들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지만 내가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지 않으므로











얼마 전 손일기를 쓰다가, clinical이라는 단어를 '의학적인' 말고 다른 걸로도 번역할 수 있나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객관적인' 정도로도 번역 가능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이 상황이 '누가 봐도 이런 상황'은 아니었으면 한다는 거다. 죄다 내가 지어낸, 통역 불가능한 손발짓이었으면 좋겠다. 몇 년 전 DSM-5가 개정판으로 나오기까지는 장장 14년이 걸렸단다. 뭔가를 그렇게 아주 단단하게 객관화할 수 있는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건 뻔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참을성 없는 나에게 무슨 소용이자 의미이지?


어릴 때부터 늘, 여름을 꾹 참고 나면 내 생일이 온다고 생각했다. 월말이고, 이른 생일 카드를 같은 날 두 장 받았다. 독일에서 온 카드에는 영어와 독일어가 섞여 있었고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다. 한국에서 온 카드에는 엄마가 '내가 너를 낳은 나이의 생일을 네가 맞아 더 뜻깊다'고 썼다. 아빠의 한글 글씨는 언제 봐도 모르는 사람 글씨처럼 낯설다. 다른 나라 글씨 같다. 오늘 저녁에는 생각보다 늦어진 퇴근에 지쳐서 후드 유리에 머리를 좀 박아가며 세포에 단백질을 뿌렸는데,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들었던 곡이 나왔다. 그땐 몰랐다. 어떤 일들은 부끄러울 만큼 좋아서 기록조차 할 수가 없다. 그게 나의 도덕이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더울까? 그 말에 땀은 여긴 아직 덥지도 않은데, 했다. 역시 북쪽은 거의 다른 나라다. 몇 주 전 주말, 물이 6년 연애 끝에 여자친구와 결혼하는 걸 보러 미시건에 갔을 때에도, 공기의 선선함에 팔에 돋은 닭살을 손바닥으로 쓸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긴 덥지가 않네, 우린 대체 언제까지 더울까? 그나마,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주변의 기온이 순간적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나는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과 눈썹달 모양이 된 태양을 올려다 보면서도 기온의 변화 같은 건 눈치채지 못했다. 구름이 잔뜩이었고, 비도 오고 있긴 했으니 변수가 많았다.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주의 기울였을 수도 있지만 누구나의 많은 일들이 전부 다, 그런 것 같다. 여튼 미시건 방문은 처음이었다. 땅 모양이 장갑처럼 귀엽고 희한하게 생긴 동네. 거기엔 11월에 또 가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 몇 달 전 결혼식 장소를 상담하러 물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그렇게 물었고, "여자친구랑 아무리 오랜 기간을 같이 지내도 지금보다 덜 좋아지지가 않더라고." 망설이지도 않고 물은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결혼식은 작고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다음 날 신혼부부는 옐로우스톤으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했고, 나는 수면 부족인 상태로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해 조에게 가져다 줄 선물을 고민하다가 미시건 체리가 들어갔다는 살사를 샀다. 미시건 체리라니, '어느 지역의 특산품인 체리'로는 그동안 '시애틀의 레이니어 체리'밖에 몰랐는데 미시건이 원래 체리로 유명하다고, 살사를 받아든 조가 신나 하며 말해주었다. 며칠 뒤 조는 체리 살사를 개시했는데 먹어보니 페퍼젤리랑 비슷한 맛이 난다고 했다. 나도 맛봐야겠다, 했는데 아직 맛보지 못했다. 원래 매년 여름마다 체리를 의욕 넘치게 먹었는데 올해는 좀 시들하다. 어쩐 일일까, 하지만


더운 것은 확실하고, 종종 비가 오고, 다른 지방의 허리케인 여파로 요 며칠 덩달아 서늘해지긴 하지만 이 여름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마음에 주관적인 먹구름이 오간다. 어느 주말에는 오후에 카페에서 '당장 끝내야할 급한 일은 아니지만 마음이 저 혼자 급해서 일단 하고 보는 일'을 두어 시간 하다가 짐을 챙겨 그대로 바닷가로 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름이지만 그와 동시에 여름이 아깝게도 끝날까봐 조급하기도 한 것이다. 서쪽에서 나를 쫓아오는 먹구름을 곁눈질하며 주차를 하고, 모래사장에 털썩 앉아 아툴 가완디를 읽었다. 내가 카페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학교에서 카페로 자리를 옮겨 합석한 조도 이십 여 분 뒤 나를 찾아(쫓아?) 바닷가로 왔다. 하늘이 굉장한 잿빛이었지만, 비를 뿌리고 번개를 꽂는 것이 저 멀리서 보일 뿐 우리가 앉아 있는 곳으로는 오지 않았다. 모래에 발을 얹고 우두커니 있었다. 거봐, 내가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했지? 조는 낮은 천둥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하고


어느 밤: 다리를 오르고 내리면서,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수면을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조는 차를 느리게 몰았고, 나는 시계를 확인하다가 조바심을 냈다. 조는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움켜쥐며 미안해했다.


그런데, 내가 다리 건너는 걸 좋아한다고 얘기했었나?


아니.


그래도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착석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마음대로 수축하고 늘어나는, 이상하고 소중한 영화였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는데 영화 끝에 올라오는 크레딧에도 그들의 이니셜만 적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는 차에 기름을 좀 넣어야겠다며, 집에서 두블락 떨어진 주유소로 우회전을 했다. 조가 주유하는 동안 나는 핸드폰으로 로저 이버트 리뷰를 읽느라고 그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신경조차 못 썼는데 갑자기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차에 주유기를 꽂아 놓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온 조가 뒷좌석으로 맥주 식스팩을 던져 두고 내 품에 샤도네이 한 병을 안겨주었다. 나는 좀 소리내어 웃었다. 그 순간 행복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체 뭐고, 어떻게, 왤까? 분석과 질문은 내 체질이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여튼 나는 샤도네이를 끌어 안고 계속 웃었다. 조는 나를 만나고 나서부터 많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드디어 만족을 넘어선 행복,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올 초 그는 공항에서,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때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다. 나라고 매우 신나는 인생 살아온 건 아니지만 살면서 행복했던 적 분명 있었고 따져보면 많았던 것 같은데, 불행하다 생각했던 적도 많긴 했지만, 그렇게 설명해보아도 고개를 저었던 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 행복은 선명하다고 말을 할 때 나는 되려 조금 납작한 기분이 되어서, 너 지금 너를 속이고 나를 속이는 건 아니지? 괜히 물어보며 불안과 미안함에 고개를 떨구면 조는 내 얼굴을 붙들고 제발 나를 봐, 한다. 덕분에 습한 생각을 떨치고 시선을 모으면 눈앞에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객관적인 바다가 성물聖物처럼 서 있다.



+ unknown mortal orchestra - swim and sleep (like a sh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