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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감정을 실어서 한 번 더











비행기 여럿 중 하나를 놓칠 뻔 했고 가까스로 좌석에 몸을 구겨 넣으며 침을 삼키다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아프리라는 걸 따끔하게 직감했다. 사실 잘못했던 일이 여럿 생각나긴 했지만 머리 한켠으로는 다른 시나리오를 열심히 재생했다. 해가 지기 전에 겨우 가방을 찾고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갑자기 "나 만족하며 살긴 했어도, 막 두근거리고 흥분될 정도로 행복했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 그 전날에는 카옌 페퍼가 들어간 달고 매운 커피를 마시면서 덩치가 나만큼 큰 개와 놀아주다가 아무 말이 나오는 아무 영화나 틀고 보다가 코트를 나눠 덮고 이불 낮잠 들었다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고요한 지붕에서 눈이 새처럼 후둑 떨어지는 걸 목격했다. 물론 몸이 온통 개털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눈밭이 모든 잡음을 아득하게 빨아들이고 남은 거라곤 가까운 주변 뿐이던 그 진공이 곧 만족스러운 행복과 별 다름 없지 않냐고 반문하고 싶었는데 나는 두어 시간 전의 예상대로 칼을 삼킨 듯 목이 아파오는 바람에 기침을 하며 그 사이사이로


while we pursue happiness, we flee from contentment


예전에 주워 읽은 한마디만 고작 건넬 수 있었는데 이내 선명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기침이 뜨거워서 더는 말 못 했다,는 건 핑계며 변명이고, 차근차근 말을 하다보면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진짜가 될까봐 그만 일어서서 주차장으로 향했는데


말이라는 건 마치 어떤 외곽처럼 내 안에 고인 물을 얼음 얼린다. 그게 명명命名이 가진 힘이고, 고대의 사람들에게 파랑이 녹색과 다를 바 없었던 이유며, 모든 그럴싸한 진단의 첫걸음이다. 원(통)형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Ted ChiangStories of Your Life를 읽은 날에는 작년 개봉작 중 제일 좋았던, 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다시 생각나면서, 그간 입 밖으로 내면 진짜가 될 것 같아 하지 못했던 말들과 적고 보니 끔찍해서 구겨 버렸던 문장들과 결말을 안다고 생각해 하지 않았던 일들이 여죄처럼 줄을 지어 생각이 나 괴로웠다. 그래도 내 글을 읽을 땐 좌에서 우로 순차적으로 읽는 대신 그림 보듯 반/시계방향으로 볼 때가 많다는 누구의 오래된 말을 상기하며 나를 위로하고 싶었는데 별로 잘 안 됐다.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가 밤이 늦고 나서야 맥주 두 잔에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거리를 괜히 빙 둘러 걸었다(분명 동행인이 있었을텐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별로 취하지도 않았는데도, 내 생각만 오로지 나의 생각만 한 건지). 말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아 침대에 엎드려 전화를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 대화가(혹은 방백이) 통째로 희미하지만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가 대강의 개요였던 것 같다. "그런데 있잖아, 그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설령 내가 안다고 해서, 내가 그걸 정말로 안 할까?"


하겠지?


뻔히 알아도 하게 되는 일들은 일단 내뱉고 지켜보는 말 같다. 막무가내로 흘려보고 어디까지 흐르나 지켜보는 꼴인데, 아무리 그릇에 담아 건넸어도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나는 내가 진창 만든 웅덩이에 빠지기 싫어서 되도 않게 허우적대다가


모노폴리를 하듯 숫자를 던지고 도시를 바꿔서 발 딛어지는 곳마다 우두커니 서 있었다. 추웠지만 또 그렇게 춥지는 않았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는 대신 첼시에서 미드타운까지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제일 최근 미드타운을 온통 걸었던 건 재작년(벌써?) 크리스마스 즈음이다. 그날 함께 저녁을 먹고 나란히 걷던 사람이 별 맥락도 없이, 자기는 주저앉을 자리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혼잣말하듯 툭 뱉길래 새삼 놀라 그를 올려다본 기억이 있다. 내 위로 그림자 드리우는 모습이 조금은, 내가 올라보지 못한 산 같았나? 그 사람은 웬 회식 자리에 나를 데려갔고 나는 요란한 음악 사이에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거기를 빠져나와 타임스퀘어까지 또 다시 걸었다. 미안, 나는 그런 식으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거리를 따라 선로를 따라 항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을 때에만 겨우 침착한데 나 언제까지고 그래도 돼?


그래 그때도 그렇게 걸었구나, 하면서 그랜드 센트럴 역을 관통해서 걷는데 하늘처럼 높은 천장을 보는 순간 아무한테나 팔 붙들려서 아무 기차나 잡아타고 싶었다. 그럴 일 없었지만, 방금 내가 이 문장을 썼기 때문에 내 욕망은 진짜가 됐다. 그러니 언젠가 일어날 일이다. 결국 이 모든 걸 알아봤자 내 마음을 말해봤자 나는 어떤 곳으로 꾸준히 흐르고 그러니까 정말 너무, 어처구니 없이,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지듯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 학을 떼고 난리야, 원래 안 그랬잖아?" 그 말은 어디서 들어봤다.




+ daedelus - order of the golden d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