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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존재

2016



수국, 장미, 히아신스, 튤립, 이렇게 발음만으로도 입안 가득 풍성한 꽃 아닌 짖궂은 뿌리에 매달린 식물들 버릇처럼 해를 향한다. 노을 따라 집을 나서서 나의 동쪽 아닌 서쪽에 물을 두어봐도 딱히 나쁜 일이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시시했던 건 아니고, 특별하다 믿었던 것들을 신봉하다 관둔지 오래 되었지만 파도와 안개 앞에서는 자꾸 어지러웠으니까. 낙서 지우는 사람의 마음으로 간밤을 구길 때마다 나 이렇게 끝까지 재미 찾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에는 내가 있는 곳마다 거기가 곧 낙원인 걸. 그게 아니라면 이 서사는 다르게 설명 될수도 없다.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는다. 이럴 줄 알았을까, 싶은 그런 선명한 순간들은 어차피 창문만 열면 또 보인다. 그게 근육 기억이 아니라면 별 달리 뭐라고 불러야 했을까? 네가 나를 안고 읽으면 나는 점자가 된 기분이 드는데


"신이시여 만일 정말 계절이시라면,

제가 여기에 닿기 위해 이미 지나온 것이게 하소서"


책을 덮어두고 불을 끈다. 예상 밖의 아무 순간마다 조금 놀라기도 했다. 나는 여기에 종종 없어왔고, 내가 그런 식의 자랑이 될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그런 식의 사랑을, 그런 식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떠도는 동안 끊임없이 품고 새겼다. 이것은 나를 아주 오래도록 달콤하고 반짝이게 하겠지. 그 대신 완벽하게 지치는 날이 오면 당장 포기할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고 단단하니까, 그러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비스듬한 지붕 아래로 빛이 눈썹 넘친다.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잠든 등 같은 건 암실 같은 꿈 속에서 재차 인화된다. 윤곽을 두 눈 뜨고도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너의 범죄 중에 제일 악질이 정말 나였어? 내 안에서 네가 본 것 과연 문명이었어? 그게 아무리 꽃밭이었어도,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심판을 앞두고도 답을 구하지 못하며,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악쓰듯 어둠을 포개며,

나쁜 다정함은 없다고 믿나이다.


뭐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할 수도 있다. 입 안에서 사탕 굴리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너 사실은 우리 이럴 줄 알고 있었지? 알면서도 물어본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탄성과 환호가 딱 일 년 어치 더 모였다. 비가 내리고 벽의 그을음은 가시질 않고 내게 기쁨 주지 않는 퇴적물은 모른 척 하면서 나는 자꾸 촛농을 흘리고 깜빡이면서


사랑해, 너는 나의 사달이야, 그러니까 더는 나를 미워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