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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 허수경 '레몬' 부분











어느 주말 늦은 저녁 복도 바닥에 앉아 친구에게 받은 초콜렛을 바나나와 함께 저녁 삼아 씹어 먹으며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피곤했고, 집에 가고 싶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자를 하느라 핸드폰을 만지는데, 화면에 금이 간 부분이 자꾸 손톱에 걸리는 것이, 곧 조각으로 떨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날 낮에 일하는 도중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작년 연말 처음 금이 갔던 핸드폰 화면이 팔 개월을 버텨주다 드디어 이렇게 산산조각 나버리는구나 한여름에 우박 날리듯 어두운 복도에 파편 날리겠구나 그래 이 정도면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화면 귀퉁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유리 조각을 손톱 뜯듯 잡아뗐는데 덜컹 떨어진 건 핸드폰 화면이 아니라 핸드폰 대리점 직원이 화면에 붙여준 강화 유리였다. 본뜬 석고마냥 핸드폰 화면 윤곽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탈출하는 깨진 것들을 보았다. 조각난 몸을 바깥의 힘을 빌어 겨우 붙들고 있는 킨츠기 같은 생활이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던 것이다. 부서져있던 것이 외부 아닌 내부라 믿어온 긴 시간이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도 않고. 나는 언제나처럼 너무 늦게 깨닫고. 하지만 더 늦게 알았을 수도 있지. 나의 밖에 금이 가도 나의 안은 온전한가 봐. 신탁받은 사람처럼, 문자 하던 사람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침마다 태엽처럼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먼지에게 밥을 주고 식탁께에 우두커니 서서 빛이 벽을 치고 가는 흔적을 바라보는 동선의 반복이 온통 깨져 있는 나를 지탱한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안간힘으로 그 동선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래도 너는 매일 침대에서 기어 나오기라도 하잖아? 복학한 친구가 통화 도중 그렇게 따져 묻듯 말한 게 기억이 났다. 낮잠을 자고, 식탁을 닦고, 문을 여러 번 열어 주고, 보이후드를 보면서 떠들썩하게 굴었다. 남은 음식을 며칠 도시락으로 챙겨 다녔다. 너 요새 기분 좋나 보다. 최근에는 그런 말까지 들었다. 그런가 보다. 인터넷으로 강화 유리를 새로 주문했고, 목이 꺾인 USB 케이블을 버리고 그것도 하나 사고, 잊고 있다 생각난 것처럼 필름 값도 결제했다. 뭔가를 찾으려 상자를 뒤지다 보면 못 받은 사진 같은 게, 아무래도 생각이 난다. 못 받은 건 많지. 안 받을 이유도 없지만 받을 이유도 딱히 없다. 후회는 한다. 조금이지만. 누워서, 생각을 해본다. 나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내게 영향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 마음을 호감이라 곧잘 착각해왔다. 이따금 비바람이 잠을 깨운다. 허리케인이 온다고 한다. 잠에서 깨면 식물의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나는 또 착각을 하고, 고맙다는 말은 자주 슬퍼서, 옷을 갈아 입고 안경을 닦고 베갯잇을 벗기고 카메라 필름을 바꿔 넣고 액자를 교체하듯 차근차근 나의 바깥을 갈아 끼운다.




+ julianna barwick - one ha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