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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나는 노을을 잔뜩 불러다놓고 / 노을의 바깥을 생각한다"



-- 임경섭 '너의 장례' 전문











옴니버스 식으로 살고 있다. 비틀거리며, 하루와 한나절과 한 시간을 통과해 개별의 에피소드에 매듭 짓는다. 허무한 기분으로 문을 닫으며 깨닫는다. 특정 시공간에서의 기억을 괜히 episodic memory일화기억이라고 일컫는 게 아니구나.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모여 나의 터널을 오돌토돌하게 만든다. 주저하면서, 우리가 마치 하나의 에피소드 같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지금 내가 고작 이야기감 밖에 안 된다는 뜻이에요? 당황할 걸 뻔히 알고 해본 말에 그런 게 아니라고 황급히 내젓는 웃음 섞인 손을 보며 나는, 그치만 난 사실 상관 없어요, 이 말을 하는 대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따라 웃었는데,


알갱이 모양의 이야기라도 되는 게 어딘지.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졸업을 준비하는 고학년 친구들은 지난 시간을 하나로 엮는 이야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목소리에 밑줄 쳐가며 말한다. 나는 점점 할 이야기가 줄어들고 만다. 그늘 아래 넋놓고 누워 있다. 그렇다면 나도 나대로 미루고만 싶다. 하지만 할 수 없지. 나는 너무 정직하니까. 울고 웃는 나의 넋두리에 친구는, 네가 그런 이야기를 되풀이할 수록 나는 너에게 더욱 믿음만 가. 이런 믿음 가지 않는 말을 뿌리고, 나는 혼란해한다. 괜찮은가. 과연 건강한가. 이건 끝이 날까. 저것도 끝이 날까. 계속 자문한다. 그건 답장을 받지 못할 걸 알면서 편지를 쓰는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지내, 여기에 연락하면 내 연락 볼 수는 있어?"


종이 왕관을 쓰고 자전거로 질주를 하는 소년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나서, 거실의 불을 꺼둔 채로 이야기를 했다. 보이후드 생각이 난다는 말에, 나는 8월마다 보이후드를 본다고 했다. 그럼 같이 보자. 그래, 그것도 좋겠네. 일기장 보는 기분이 드는 영화를 남과 함께 보면 덜 서글플 수도 있겠다. 어제는 엄마가 전화 통화 중, 얼마 전 빈 내 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책꽂이에서 내 고등학생 때의 일기장을 찾았다고 고백했다. 너 이런 것도 적고, 저런 것도 적었더라, 라며. 그걸 또 읽어 봤어! 나는 과장 섞어 호들갑을 떨었다. "네가 그 어린 마음에 이런 저런 기분을 담고 살았다는 걸 엄마는 몰랐고, 그래서 놀랐지." 나도 놀랐다. 그때 나름으로 그렇게 애달팠던 것들이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자세를 고쳐 누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싶다가도, 누군가들은 나에게 열쇠와 함께 빈 집을 맡기고, 비상연락망에 내 이름을 올리고, 기대 없이 쓴 짧은 노크 같은 나의 편지에 답장을 한다. 나는 주인 없는 집에 숨죽이고 남은 식물에 물을 주고, 고개를 갸웃하며 내 주소를 불러 주고, 편지를 여러 번 반복해 읽다가 글썽이는 마음이 된다("이쯤 되니 너에게 보고 싶다는 말도 미안하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반지를 소파 아래에서 찾아 다시 손에 끼우고, 잃어버린 나의 다른 것들도 찾아야지 다짐을 하고, 집에 와서는 '오늘은 그래도 좋았다' 적어두고 고기를 썰며 물이 끓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살아가는 지금과 살아갈 시간이 마음에 든다고, 그는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남의 선언이 이토록 위로가 된다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것도 반드시 끝나고,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도 언젠가 끝이 난다. 시간을 방울방울 끊어먹는 기억이어도 뒤돌아서 읊어보면 나의 상태-hood는 연속하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잊고 있었지 하지만 자책은 관두기로 했잖아 잊어도 되니까 잃지는 말아야지. 아니. 잃어도 된다. 하지만 잃어도 전부 다시 찾아 마음에 반지처럼 주렁주렁 끼울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은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만났던 것 같다.



+ kindness -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