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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나도 허공이었던 것을 너만큼 변심으로 내 발등에 엎지를 줄 안다"



-- 조연호 '여름' 부분











어쩔 수 없는 기분으로 출근을 하는데, 다리를 건너자 앞의 차들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소방차와 경찰차가 여럿 있었다.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좌회전 구간을 앞두고 서행을 하며, 들것에 실려나가는 사람의 상체를 보았다. 몇 달 전 같은 구간에서는 누가 죽었다. 그날 저녁 즈음 친구 하나가 단체 메세지를 보냈다. 다리로 향하는 도로에서 어떤 사람이 차에 치여 죽었고 사고를 수습하느라 도로를 막아놨으니, 바닷가 사는 사람들은 유의하라고. 차라리 고속도로를 타고 빙 둘러 바닷가로 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그건 내가 아직 퇴근하기 한참 전이었고, 나는 저녁 늦게 잔해조차 없는 찻길을 달려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며 생각했다. 왜 죽었을까, 어떻게 그랬을까, 어쩌다. 퇴근 피크 타임에 누군가 무단횡단 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후 들은 얘기에 의하면, 두 사람이 싸우던 중 한 사람이 다른 하나를 찻길로 밀었단다. 미친 사람들, 이라는 두 마디로 친구들은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나는 왜, 왜, 절대 알 수 없을 본인들도 모를 경위 때문에 우울해졌고,


가끔은 심장이 아픈 것과 마음이 아픈 걸 구분할 수 없다. 어제 그건 평소보다 조금 더 심했다. 손끝으로 같은 지점을 눌러보며 의아해했다. 물과 간장에 설탕과 식초를 넣고 졸이며 빛이 가늘어지는 창밖을 보았다. 침실과 거실은 동향이지만 부엌과 현관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긴 하루 끝에 귀가하면 대문에서는 후끈 더운 나무 냄새가 나고, 부엌은 세상 모든 빛을 홍수 쏟고 있다. 오랜만에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다 왠지 한참 축구 보고 있을 것 같아서 말았던 친구는 몇 시간 뒤 와썹, 그냥 생각났어, 라며 전화를 걸어왔고, 내게 다짜고짜 우울해? 물었다. 잘 지내? 도 아니고. 우리 이렇게 되어버릴 줄 몰랐지만 어쨌든 이렇게 되어버린 거 각자 지치지 말고 아니 지치더라도, 잘 매달려 있어보자는 요지의 얘기를 한참 주고 받았다. 어떻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째 같고 똑같은 발전 없는 이야기들.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삼 년 훨씬 전이다. 양 어깨를 붙들리고 덜 겁먹고 더 잘 살 것을 다짐 받고 열두 시간을 연기처럼 흩뜨린 뒤 잠 부족에 몽롱한 기색으로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인사했잖아 오래 못 볼 걸 직감하고 어제보단 조금 더 길게 안으면서 양질의 삶 맹세하는 사람들처럼. 그런데 이젠 그것도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


왜?보다는 어떻게?를 생각해야 한다고 교육 받았지만 난 이따금 다 지겹고 귀찮고 힘들어서 마냥 왜, 왜, 멱살 잡듯 묻고만 싶다. 왜냐니, 라는 소리를 들어도 끝까지 왜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능력 같은 건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개체의 생존 가치를 높여주는 매커니즘이라고 했다. 밑줄 쳐가며 열심히 배우긴 했는데 그게 진짜라면 조금 재미가 없다. 그런 식이라면 나라는 개체는 흥미를 잃고 마네요. 비이성적인 낙관을 가져보는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명이 각자 독립적으로 내게 그런 말을 거듭 해오자 그런 건 어떻게 가져? 이전에 왜? 라는 의구심이 든 건 맞다. 하지만 매일 아침 재생renew; replay되는 것이 희망이라면 전날 밤 신성한 마음으로 공들여 잠들 수도 있겠다 싶은 걸 보니 과연 내게 필요한 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풍선처럼 부푸는 꿈과 헛된 희망인가 싶기도 하고. 둘레를 둘러보며 아무렇게 움켜쥐었다. 손이 크지 않은 남의 손을 잡았다. 남의 손인데도 내 손을 맞잡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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