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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 보지 못한다"



-- 강성은 "환상의 빛" 부분











여러 명이 떠났거나, 떠나고 있다. 느슨하게 알던 동물실 직원이 갑작스레 다른 주州로 이직하는 것으로 시작해 미국에 와서 몇 주 같이 있던 엄마도 귀국했고, 오피스 옆자리 포닥도 일을 정리하고 체코로 돌아갔고, 일 년 넘게 같이 살았던 예전 룸메이트도 내게 가구 두어 개를 주고 떠났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포닥도 다음 주면 캐나다까지 차를 몰고 간다. 빈 자리 어색할 틈도 없이 또 그만큼 여럿이 온다. 여름 인턴을 하려는 학부생들로 건물이 가득해 복도를 지날 때마다 낯선 얼굴을 보고, 다다음 주면 대학원 신입생들이 캠퍼스 방문차 본부에서 여기로 내려온다. 일찌감치 우리 캠퍼스 소속을 택한 얼굴 말간 신입생은 계단에서 나를 마주칠 때마다 클로이 안녕, 좋은 아침이지, 너무나도 환하게 인사를 한다. 너도 좋은 아침, 난 아직 커피 못 마셔서 잠이 덜 깼네. 나는 그런 식으로, 태양 같은 그 애의 인사를 받으면서, 소년처럼 기대에 찬 표정을 보면서,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하면서, 지났다는 것만 잘 알겠고 뭐가 지났는지는 자꾸 기억나지 않으면서,


태양의 내핵을 끌어안듯 여름의 한가운데로 진입하면서, 일 년 반 만에 이력서를 업데이트 했다. 나선형으로 떨어지는 내 궤적을 평면화하는 일은 부끄럽다. 내가 허우적댄 시간들이 평면도가 된다. 자꾸, 못한 것들만 생각이 난다. 언제나처럼, 이라고 지나가듯 말했더니 친구가 화를 냈다. 언제나가 아니라며. 어째서지. 분명 연속하고 있는데. 나의 염려는 사족일까. 그렇지만 유불리 못 따지는 건 난데. 안그래도 미친 사람 때문에 화가 잔뜩 나서, 암실을 나서며 울었다. 필름 현상액 냄새를 맡아도 눈물이 났다. 왜 해야 하는 경험은 못 하고 안 해도 되는 경험만 하는 걸까. 암실처럼 불 꺼버리고 싶은 졸린 머리를 연필 대신 부여 잡고 식탁에 앉아 모르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 그 사람은 몇 마디 인사 후 꽤 일찍 고민하네요, 그 말부터 건넸다. 저, 고민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그러나 궁금한 것들은 궁극적으로는 고민의 형태를 띄겠지. 고민을 하기 위해선 기저에 흥미가 깔려 있어야 하겠다. 그래야 성립되는 상황이지 않나, 해서 꺼내본 말인데 누군가는 아니라고 했다. 흥미가 있으면 고민을 왜 하냐며. 아니 정말 왜 자꾸 그래, 나 좀 대견하게 여겨주면 안 돼? 발을 구를 뻔 했다. 딱 한 명만 괜찮다고 했다. 그거 알아?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늘 너무 자신만만한 것 같아. 안 할 거면서.


그러게. 안 할 거면서. 난 할 거야. 할 건데, 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어. 못 할 거면서 하고 싶어해. 잠에서 깰 때마다 이력서 기분이야. 있잖아, 이게 더 비극 아니야?


그러는 나를, 자꾸만 흥미롭게 지켜보고, 나는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를 전시한다. 언제나처럼



+ kim brown - trans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