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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There is no language without deceit."



-- From Invisible Cities by Italo Calvino











바다도 없는데 파도처럼 온다. 이해할 수 없지만. 활자를 좋아하다 이렇게 된 걸까. 행간에서 잔뜩 놓쳤다. 자꾸만 상관이 없어진다. 하지만 내가 빠진 서사는 참을 수 없다. 쉬운 마음이고 싶다. 그건 쉽지 않다. 대신 쉽게 괴롭다.


-- 위와 같이 써두고 노트북을 덮고 사흘을 쉬었다. 적은 수의 사람들을 길게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고, 혼자 많이 걸었다. 몸에 바람이 자주 들어오고 나갔다. 손톱에 긁혀 올이 나간 스타킹을 보면서 깔깔 웃는데 머리가 가벼워졌다. 우리는 다들 정말 건물인가봐, 자꾸 환기 시켜줘야 하고. 하지만 넌 우리 인생은 건물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말했지. 선 위에 다른 선, 색깔 위에 다른 색깔 덧입혀도 된다고 했다. 왜 현자 같은 말을 하냐며 웃자 그냥, 우리가 테두리보다는 좀 더 추상적이어야 할 것 같아서, 라고 너는 말하고


하지만 나는 내가 건물이라면 유리창이 많았으면 좋겠네. 불행을 전시하는 데에 변명이 필요 없게. 나는 남이 나를 위해 갈아두고 출근한 주스 한 잔에도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인데 왜 자꾸 불행에 대해 생각하지. 소파에 앉아 꿀꺽꿀꺽 주스를 삼키며 억울해졌다. 과일이 여럿 들어가 건강한 맛이었다. 주스에 생강도 갈아 넣었구나. 나 생강 좋아해, 생강 특유의 맛은 힘이 나. 생강,이 자꾸만 생각,으로 오타가 난다. 주스에 생각도 갈아 넣었구나. 나 생각 좋아해, 생각 특유의 맛은 힘이 나.


쉬고 돌아오자마자 전쟁터고 전쟁만 있지 사랑은 없어서 나는 아무 일이나 저지르기에도 곤란한 지경이다. 실패는 너무 비싸다. 비열해지는 건 쉬운데 비열해지고 싶어지는 건 어렵다. 하기 싫은 건 할 수 없고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이렇게 제멋대로 까다롭네. 애초에 그냥 서정 찾다 적당히 죽었어야 했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의 윤곽은 대체로 또렷하고 나는 수평선 흐린 내가 절망스러워서


사실 나는 헌신할 자신이 없어. 어지럽게도. 탈 것을 타고 움직이고 있을 때 책을 제일 잘 읽는 것처럼 몸이 흔들려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나는 어떤 것보다도 그 어떤 것과 나의 간격을 너무 사랑해. 잘 봐. 끝까지 행간에서 헤맬 거야.



+ evade - inside/outs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