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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Out beyond ideas of wrongdoing and right-doing, there is a field. I'll meet you there."



-- by Mewlana Jalaluddin Rumi






첫날부터 정신이 없었다. 오전 내내 밀린 이메일을 처리하고 수업 준비를 하고 점심을 먹고 랩에 올라가서 벤치에 앉으니 건너편 벤치의 테크니션 아주머니가 휴가 끝나자마자부터 실험하네 클로이, 하셨다. 안 하면 큰일날 것 같은 걸요… 물론 큰일은 나지 않는다. 오후에 잠깐 숨 좀 돌리며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보는데 영국으로 간지 얼마 안 되는 친구가 기숙사 전기 스토브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불이 안 들어와서 요리를 못한다며. 사진 속 스토브 버튼을 보면서 이것저것 눌러보라고 일러주자 조금 있다 스토브가 작동한다는 답장이 왔다. 갑자기 짠한 기분이 들었다.


너 재작년 이맘때에는 나한테 죽고 싶다고 문자했는데 이렇게 잘 살아남아 런던 가서 다행이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자 친구는, 우리가 얼마 전 이태원에서 만났을 때 나에게서 직접 그 말을 들었다면 울었을 거라고 했다. 그럼 나도 울었겠다. 나는 그 애가 우는 걸 본 적이 있다. 봄방학이었고, 사순절이었고, 다른 친구의 집에서였다. 나는 호수가 보이는 거실에서 자다가 그 애가 통화하는 소리에 깼다.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보니 그 애는 식탁에 앉아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마를 감싸고 울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냥 어깨나 좀 짚어주며 괜찮냐고 물었던 것 같다. 죄책감 갖지 말라는 말도 했었을 것이다. 이후 집주인 친구도 잠에서 깨 우리는 밖으로 나가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그게 이미 삼 년 반 전의 일. 출국을 이틀 앞둔 그 애와, 출국을 일주일 남겨둔 나와, 마지막 출국이 몇 년도 더 전인 그 집주인 친구, 이렇게 셋이 다시 만나 외벽이 노랗던 이태원 어디 한 술집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술과 커피를 나눠마신 건 벌써 지난 달의 일.


우리가 다들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한복 입고 산 속에 갇혀서 개츠비나 읽었지 자습 시간 한 타임에 우유 마시면서 SAT 두 세트씩 푸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감시 카메라 피해 풋내나는 연애나 할 줄 알았지 각자 이렇게 될 줄 전혀 모르면서 만난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하게 혼란스러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면서


잘 살자, 다짐을 하고 잘 살려면 잘 먹어야지! 하면서 평소 가는 마트 말고 집 건너편의 유기농 마트에 갔다. 친구가 생일날 브런치로 양송이버섯과 이탈리안 스윗 소세지를 구워줬던 것이 기억나 그 두 개를 장바구니에 넣고, 달걀 한 팩과 우유 한 통과 샐러드 채소 두 봉지, 아침에 먹을 요거트 여럿을 챙겼다. 계산대에 서있다가 잠깐만요, 하고 석류 와인을 집어왔다. 버섯과 소세지를 넣어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어 와인과 함께 저녁으로 먹었다. 스파게티는 맛있었고 와인은 그냥 그랬다. 경품으로 받은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는 나를 보고 룸메이트가 와인잔 좀 사야겠네, 했다. 스파게티 남은 건 점심 도시락으로 가져가려고 소분 냉동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설거지를 끝내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잘 먹었지만 잘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혹은 그와는 별개로, 출근을 해도 퇴근을 해도 의욕이 없었다. 나흘째 잠들지 못 할 것이 겁이나 아주 오랜만에 욕조에 라벤더와 꿀 냄새가 풀풀 나는 물을 받고 그 안에 오래 앉아 있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게 기분이 좋았다. 몸을 말린 뒤 요란한 향기에 둘러쌓인 상태로 숙면했다. 꿈을 좀 꿨는데, 잠에서 깬 나는 그게 꿈인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핸드폰을 봤다. 방을 들락날락하는 햇빛이 왠지 어제처럼, 지난 달처럼, 작년처럼, 익숙했다.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시험 감독을 하며 수업 준비용으로 읽었던 논문의 한 문장처럼: “자코비 교수 연구팀은, 노력이 필요한 상기력이 노화로 인해 망가진다 하더라도 익숙한 것들에 대한 반사적인 감정은 지속됨을 밝혔습니다.



+ buscabulla - méte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