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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기원은 내게 잘못된 일은 없다고 말해주었다 / 그렇다면 다행이다"



-- 황인찬 '개종' 부분






미네소타는 기대보다는 더웠지만 예상보다는 시원했다. 그냥 조금 따뜻했다는 얘기다. 손목시계를 한 시간 늦추며 올해 초를 생각했다. 미네소타에서 살다가 플로리다로 이사온 친구에게 빌려온 파카를 입고도 추워서 종종걸음치던 한밤을, 양 옆으로 정말 아무것도 없이 들판 뿐인 고속도로를 달리던 새벽을, 일정 중간에 혼자 호텔 방으로 돌아와 커튼을 쳐두고 침대에 누워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어두운 대낮을. 그 호텔은 미네소타에 출장 갈 때마다 학교가 지정해줘서 묵는 곳으로 방의 공기는 건조한데 침대 시트는 어딘가 묘하게 덜 마른 듯 축축한, 그러면서도 부드럽지도 않고 거친, 별로인 곳이다. 잠에서 깰 때마다 건조해진 코를 킁킁대고 이불 아래서 불편하게 뒤척대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본다. 그러다가 여긴 내 집이 아니구나, 잠 잔뜩 묻은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저녁을 먹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자 테이블 사이사이에 삼삼오오 모여서서 이야기하던 친구들이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나는 호텔 방에 들러 원피스를 청바지로 갈아입고 플랫을 샌들로 갈아신은 뒤 밖으로 나왔다. 퇴근 시간이 지나 또 다시 텅 빈 거리를 지나 친구들이 말한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생일 미리 축하하자며 친구들이 자꾸만 술을 사줬다. 남의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데낄라를 마시고, 누가 마셔보라고 시켜준 럼 칵테일을 마시고, 또 데낄라를 마시고. 저녁 먹으면서 와인도 마셨으니까, 나는 참 기분 좋게 취했다. 내가 잘 모르는 동기 세 명이 학교를 그만뒀다고, 한 명은 박사자격구문시험을 통과하고 석사를 받자마자 학교를 나가고 다른 한 명은 간호대로 옮겨가고 또 다른 한 명은 의대 입시를 준비할 기간을 벌기 위해 테크니션으로 취직했다고, 나를 둘러싸고 앉은 동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땐 잠깐 슬프기도 했지만 그건 슬픔이라기보다는 충격에 가까웠고 결국에는 기분이 좋았다. 여름의 끝이라도 가을의 시작이라서 좋았다. 장소를 옮겨 마지막으로 마신 술은 위스키였다. 위스키 잘 못 마시는데. 위스키 취급도 못 받는 파이어볼 정도 밖에 못 마시는데 기분도 기분이고 왠지 내켜서, 뭐 마시고 싶냐고 묻는 오빠에게 위스키를 사달라고 했다. 사람 적은 술집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한 잔을 다 마셨다. 술집을 나오는데 길가 테이블에 앉아 술 마시던 어떤 여자가 나에게 치근덕댔다(고 동행했던 친구들이 말해주었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양치하고 위스키 맛있네, 또 마시고 싶네, 생각하며 여기저기에 문자를 보내다 잠이 들었다.


그거 무슨 일본 위스키였는데 이름을 모르겠어, 다음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말하자 그 애는 곧바로 히비키? 하고 물었다.


응 그거야. 어떻게 바로 알지? 역시 술쟁이.


술쟁이라니, 그냥 위스키 좋아하니까.


위스키는 뭔가 어른의 맛 같아. 홀짝이는 맛이 있어.


어른이다은이네. 우리 같이 홀짝이자.


어른이 다은이. 이제는 거의 모두가 나를 영어 이름으로 혹은 다른 호칭으로 부르고, 덕분에 나는 내 한글 이름을 들을 때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조건 반갑다. 어릴 때는 내 이름이 너무 흔하다고 생각해 그게 또 싫었는데 이제는 누군가 발음하는 (혹은 적어주는) 내 이름을 들으면 새삼 신기하고, 고맙고, 기분이 좋다. 내게 꼬리가 있다면 흔들었겠지. 그건 참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이 종종 일어난다. 잘못된 일만 없으면 되니까 상관없다. 사실 잘못된 일이 있어도 별 수 없고, 별 수 없어서 괜찮다. 나름으로 살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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