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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Our despair was temporary but not less painful."



-- From Many in the Darkness by Thomas McGrath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주 전, 그래도 요새는 건강이 호전되는 것 같지 않냐며 가족들이 기뻐할 때 아빠는 이건 표면적으로만 좋아지는 거라고 결국에는 나빠지게 되어 있다고, 나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근본적인 것을 해결할 수 없으니 답이 없다는 거다." 언뜻 읽으면 비관과도 같은 그것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최근 혼자 도달한 결론: 잘 지내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잘 살지 못하고 있다. 끔찍한 일. 나의 외부를 지탱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줄이야. 표면장력은 과연 힘이 센 것이었구나. 잘 지탱하다보면 잘 지낼 수 있게 되고, 잘 지내다보면 잘 살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나는 술만 먹으면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혹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문자로) 잘 살고 싶다고, 제대로 살고 싶다고 습관처럼 타령을 하는데 그런 얘기는 뭐, 술 먹지 않아도 할 수 있고, 잘 사는 것 제대로 사는 것 그게 뭔지조차 이젠 잘 모르겠다. 제대로 그리고 잘 살자는 것은 우리 대화의 레퍼토리가 되어버렸네, 반복되는 대화에 짜증을 내는 대신 이렇게 말하던 한 친구는 내게 잘 사는 것의 기준이 뭐냐고 되묻기도 했다. "가끔 홀푸즈에서 장 볼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 아냐? 치폿레 부리또에 과카몰리 추가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던지..." 그래 물론 그 정도면 행복한 거지. 나는 네 말대로 달걀과 우유는 유기농으로 사고 치폿레에 가면 직원이 묻기도 전에 과카몰리 넣어달라고 주문해. 한 달 식비에 상한선을 정해두고 그걸 넘기는 일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의 여유 못 부릴 것도 없지. 일은 열에 아홉은 힘들지만 그래도 밤에 퇴근하면 내가 여태까지 지낸 자취방 중 제일 좋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룸메이트에게 방해받지 않고 혼자 쓸 수 있는 화장실도 있어. 일 중간에 맥주 마시러 가기도 하고, 가끔 가까운 곳으로 그리고 더 먼 곳으로 여행도 가는 걸. 하지만 내가 고달파 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의식주에 관련된 게 아니라, 만져지지 않는 것들에 관련된... 이런 새롭지도 않은 지겨운 배부른 이야기들을 주문처럼 외우며,


깔깔 웃다가도 울컥한다. 펑펑 울면서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서 괜히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우기도 했다. 안그래도 요 며칠 밤마다 손톱달이 어찌 그리 그림처럼 선명한지 운전할 때 집중이 안 될 정도로 곤란했는데. 흘끗흘끗 달을 곁눈질 하다가 엉뚱한 찻길로 빠질 뻔 하기도 했다. 혼자 차를 타고 이동을 할 때 듣는 음악은 아무리 크게 들어도 마음에 들게 크게 들리질 않는다. 백미러가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이면서도 귀로 들어오는 음악은 왜 이렇게 답답한 걸까. 부랴부랴 먹을 것 가득 채운 소포를 보내온 친구는 엽서에 네 자신을 사랑하는 걸 잊지 마,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을 한 번 더 쓰면서 손으로 일기 쓰는 것을 잊지 마, 라고도 썼다. 그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인 양. 보름 동안 손일기 쓴 적 없는데, 싶어서 또 눈물이 나왔다. 미국 반대편에 사는 친구는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와, 장난 같은 이야기 끝에 갑자기 내 한글 이름을 외치더니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글 이름을 듣는 것이 생소해서 또 울고 싶었다. 인생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꾸만 조각나 떨어진다. 그렇게 절망적인 기분으로 꽃을 껴안은 적 없다. 나를 흔들고도 내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 짐작하진 않았겠지. 노랗고 노랗게 수수께끼 같기만 한 일들. 놀랄 것도 없지만, 그래서 새삼 놀랍다. 강조만을 위한, 이런 식의 반복어법은 좋지 않다고 내 글을 읽은 한 남자가 충고를 했었다.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도 고쳐지지 못했고, 알고 있으면서도 반복하고 싶어하고, 행복만 강조하고 싶어한다. 더는 숨길 것이 없는 기분이 든다.


지금 막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니 창밖 바람에 흔들리는 흐린 나무 그림자. 예쁜데 어지럽다. 내 근본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역시 답이 없나요, 이렇게 끝으로 달려가나요. 여튼 잘 살고 있진 못하지만, 엉망으로 잘 지내려 애쓰고 있다. 답이 없어도 어쩔 수 없다.



+ tropics - ra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