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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my hands are porous things filled up by anything,"


알람을 맞춰놓았던 시간보다 세 시간 일찍 잠에서 깼다. 그냥 깼다. 활짝 열린 기분으로 깨어버려서 다시 잘 수가 없었다.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어젯밤에는 정말 피곤했지만. 이상하군. 조금 울고 싶었다. 울지 않았다. 한 시간을 그냥 누워 있다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슬리퍼를 신어도 발목이 시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 부쩍 추워졌다. 주말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질 거라고 그러지만. 여튼 이제야 정말 가을 같다. 어제 처음으로 차에 히터를 틀었다. 집에는 히터를 들지 않았다. 계란에 우유를 부어 익혀서 석류가 들어있는 요거트와 같이 먹었다. 오렌지 향이 나는 커피콩을 갈았다. 커피물이 끓는 것을 지켜보았다. 혼자서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할 때 특유의 공기가 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건 내가 자주 빗대어 말하곤 하는 장면이다. 뻔한 비유다.


어제는 중국 음식을 테이크아웃해서 오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 운전을 하며 포츈 쿠키를 뜯어 먹다가 종이도 함께 씹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었을 때 손바닥에 종이를 뱉어 보니 "오늘은 그 사람을 용서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용서라니. 누가 누구를. 말이야 쉽다. 쉬운 게 말이다.








여기에 머물기 위해 처음 내려온지 일 년이 되었다. 며칠 된 일이다. 한동안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내가 이상한 방식으로 10월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전입을 준비하기 조금 전 누군가 세상을 떠났고, 나는 퇴근길에 부고를 들었다. 사실 나는 그 날 아침 뉴스 기사를 읽었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상상도 못했다. 슬픔은 늘 그런 식이다.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전화를 걸었다. 겨울처럼 추운 날이었고, 장갑이 없어서 전화기를 든 손이 시렸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보다가 문득 엉엉 울었다. 방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앉아 전화를 몇 통 더 돌렸다. 며칠 후 나는 친구들과 톰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를 보다 말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그리고 영화를 마저 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떠나기 전 마지막 날 그는 맥주를 사주며 나를 위로했다. 높은 의자에 앉아 있어서 발이 대롱거렸다. 부끄러웠다. 내 슬픔이 뭐라고. 온기가 다 빠진 세탁물을 개키며 나는 조금 더 슬퍼졌다. 이게 뭐라고. 괜히 발을 이불 조금 더 깊숙히 묻었던 것도 같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맙시다. 그렇게 며칠 쪽잠만 잤다. 나는 밤새 짐을 싸고, 몇 가지 옷을 수거함에 내놓았다. 우악스럽게 가방을 끌고 공항에 갔다.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고 아는 사람 몇 명 없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 다음 날 친구가 신문 기사를 보내왔다. 기사를 읽는데 아는 건물 이름과 아는 후배 이름이 나왔다. 어째서였을까. 경위를 모른다 했다. 어째서였을까. 그 즈음 루 리드가 죽어서 페이스북 뉴스피드가 루 리드를 추모하는 글로 가득했는데 그 애 이야기는 단 하나였다. 어째서였을까. 가끔 슬픔이 너무 가까우면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는 걸까. 각자 자신의 기분을 소화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속이 아파서 밤새 힘들다가 다음 날 아침 시험을 쳤다. 학교 신문에 조금 더 자세한 글이 실렸다. Obituary. 내게 소식을 전해들은 다른 친구는 신문 기사에 한글로 긴 댓글을 남겼다. 클로이, 나 자꾸만 꿈에 그 애가 나와, 그런 말도 했었다. 그 친구와는 지금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10월 말에 저번 10월 말을 기억하며 더욱 간절하게 그 친구 생각을 했다. 지난 주 이 이야기를 일기처럼 몇 번 쓰다 지웠다. 일 년 전 내가 넘나들던 장소와 기분이 몸에 너무 남아있어서. 마음이 마음대로 흩어진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행이 끝이 없다고. 항상 '왜'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하자고. 기원보다는 기작이라고. 현상은 현상으로 보자고. 진작에 그렇게 배웠고, 몇 번이고 나에게 말해본다. 그게 끝이다. 질문만 있고 답이 없다. 그렇게 나는 소모한다.



+ arrange - ca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