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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our heads were reeling with the glitter of possibilities, contingencies,"




박사 1년차가 끝났다. 어제는 내가 공식적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한지 일 년이었다. 짧은 방학 중이다,만 말만 방학이라 수업은 없어도 실험실은 나간다,만 휴가도 조금씩 내고 마음도 조금은 수월하다. 나태한 걸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나에 대한 나의 관대함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이 일련의 의심은 어느 정도 비밀이었는데 여기에 써버렸다). 한여름으로 치닫기 직전이니 이 수준의 느슨함은 조금은 괜찮지 않나 생각하다가도 뉴욕에 다녀오면 꼼짝도 못하게 박사 2년차가 될텐데 지난 일 년간 나는 뭘 배웠지, 무슨 데이터를 뽑았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괴감도 들고 부끄럽기도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냥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치기로 했다.


다만, 작년에 나와 같이 면접을 봤다가 불합격했던 학생이 다시 한 번 입시를 거쳐서 우리 프로그램에 신입생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굴은 기억나고 목소리는 기억 안 난다. 이번 달 말에 신입생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애가 안녕, 내가 재수하는 지난 일 년 동안 너는 뭐 했어? 물어보면 나는


뉴욕에 가기로 결정한 건 다소 우발적이었는데 나는 걱정을 피부처럼 타고난 탓에 가끔씩 내게서 튀어나오는 우발성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므로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꽤 오래 고민했지만 어제 침대에 누워있다 말고 문득, 그래도 가기로 한 거 잘한 것 같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자마자 전화기 너머의 친구는 많이 힘들어? 망설이지도 않고 물었다. 너는 내게 힘드냐고 자주 묻곤 하지 - 이것은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는 경향이 있어서 내가 지난 시간 동안 너에게 힘드냐는 불평을 얼마나 많이 했나 혼자서 조용히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네가 나를 '걸핏하면 힘들어하는 사람'으로 기억하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러다가는 숨만 쉬고 있어도 힘드냐고 물어보겠다 조금 우스워하면서. 혹은 네가 힘든 만큼 남도 힘들 거라 짐작하는 그런 경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다들 너무 비슷한 표정을 살아간다. 그래도 노동을 거울처럼 이해받는 건 약간이나마 덜 외로운 일이다. 그 기분이 종종 필요해서 애석하게도 나는 불평이 변명처럼 잦다.


어제 나는 자다가 깨서 - 꼭 자다 깼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 짜증과 불평과 퉁명스러움을 최대한 많이 눌러 담은 단음절들로 나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불만을 표현해보려 들었는데 그런 모습으로 안타깝게 뒤척이는 나와 그런 나를 길게 달래주는 대신 일단 재우고 보려는(혹은 그게 최선이라 생각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내가 실험실 밖 복도에 나와 커피를 마시다가 파랗고 밝은 창밖을 보면서 느끼는 막연함과 마주보기만 하다가 어느덧 지나가버린 달력과 놀라워하지도 않고 힘드냐고 묻던 사람(들)과, 그런 반사적인 장면들에서 혹시 나는 침대 반대편으로 대충 밀어둔 이불처럼 어느 정도 미뤄둬도 괜찮은 사람인가 싶어서 취객처럼 소리도 없이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몇 시간 후 동향의 방이 차고 넘치게 치고 들어오는 햇빛에 놀라 깨고 보니 그런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보여서 휘파람을 불어도 괜찮다고 멋쩍음을 섞어 말했다.





어제는 오피스 파티션에 붙여둔 강의계획표를 옷을 갈아입듯 바꿔붙였다. 계절을 맞아 마음먹고 옷장을 비우는 기분과 다르지 않았다. 계절의 초입마다 그 계절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도저히 어렵다. 그러나 간절기는 착각과도 같고 환절기는 그보다도 더한 판타지임을 분명하게도 믿는다. 우리에게는 원래 계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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