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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그것은 일종의 간격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이것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로드트립을 시작한 날 새벽에는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고, 고속도로는 제설차가 새벽 내내 열심히 밀어준 덕분에 나름 깨끗한 편이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완벽하게 설국이었다. 눈길 운전은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고, 와이퍼고 뭐고 차의 온갖 부분이 얼어있어서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은 채로 운전하다가 눈을 두른 사방이 예뻤던 덕에 이내 긴장을 풀고 라디오를 들으며 기분좋게 차를 몰았다. 내가 아닌 다른 차들은 아주 드물게 보였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온 세상이 내것 같았다. '순전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순전함'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순전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와서 선글라스를 꼈다. 미네소타와 아이오와 경계선까지의 길은 너무 아름다웠고, 그래서 너무 행복했는데, 주유를 하려고 아이오와의 문턱에 멈춰 서서 가게 아주머니와 잠깐 담소를 나눈("지금 여기 아이오와에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이후로의 여정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설명해야 될 정도로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길이었다. 길과 들과 야트막한 산이었다. 지루함이 계속 이어졌고 배가 고파와서 식당 표지판을 따라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가 한 시간 정도 시골길을 헤맸다. 다시 고속도로로 돌아왔을 때 배낭을 짊어지고 민둥산 옆을 걸어가는 사람 몇을 보았다. 얕은 눈이 내렸다가 그쳤다가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내가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바깥 온도를 가르키는 차 안의 숫자가 차근차근 올라가는 뻔한 모양이 귀여웠다. 나는 그야말로 남하하고 있구나. 차창에 붙어있던 얼음 조각들이 천천히 녹기 시작하며 나의 운전 속도를 못 이기고 차 뒤로 숭숭 날아갔다. 나는 그야말로 남하하고 있었다. 살짝 어둑해질 무렵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주리의 어떤 도시를 통과했다. 세인트루이스 방향 표지판이 보였고, 한두 시간 정도 더 차를 몰고 늦은 저녁의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눈에 익은 도로에 합류하자 얼마 안 있어, 학교 주변 지리를 잘 모르던 저학년 때의 내가 학교를 찾아갈 때 지표로 종종 삼곤 했던 AMOCO 간판이 보였다. 조금 벅찬 기분이었다.


벅차다니.


이상하다.


그렇게 띄엄띄엄 그러나 분명히 생각하면서 좌회전을 했고, 또 다른 대로에 합류해서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곁눈질로 내가 수백 번도 더 걸었던 도로를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골목들과 알고 있는 간판들과 알고 있는 건물들과 알고 있는 가게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뻔한 길이 뻔하지 않게 느껴졌던 이유는 옛날에 살던 아파트 뒤에 주차를 하는 와중에, 마치 답안지를 읽는 기분으로 깨달았다. 나는 여기에 반십년 가까이 살을 부비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력으로 나 자신을 여기로 인도한 적 없구나. 늘 누군가가 나를 실어다 날랐구나. 비행기 혹은 버스 또는 기차를 타고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에서 여기로 '돌아'오면 누군가가 차를 몰고 공항이나 역의 나를 데리러와줬고, 그도 아니면 나는 택시나 전철을 타고 귀환했다. 늘 어떤 식으로 운반되었다. 제발로 걸어들어온 건 아주 처음이었다.


시동을 끈 차 안에서 친구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아파트 주차장을 벗어나 만나기로 한 펍을 향해 걸었다. 마치 퇴근해서 집에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쉬고 있다가 한 잔 하자는 친구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서던 예전 기분으로. 졸업하고 더욱 자주 들락날락했던 레코드점, 오래된 영화관, 식당, 옷가게, 주차장, 집들을 지나쳤다. 나는 아마도 상기된 표정이었겠지. 친구와 웃고 떠들며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신 뒤 헤어졌다. 정신없는 나의 연락 미비로 미안하게도 거의 쳐들어가다시피 한 예전 룸메이트 동생 아파트에는, 봄방학 직전이라 바쁜 동생의 중간고사가 끝나는 음 날 묵기로 하고는 싸구려 호텔에 갔다.


옷을 갈아입고 대충 씻고 내가 모르는 광활한 침대의 모서리에 누워서 장시간 운전으로 뻐근해진 목과 어깨 이곳저곳을 안마하다가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분명 좋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자연스레 질책을 당했다. 어떤 서운함들은 애써 발음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잊혀지는 거겠다. 나는 내가 처음부터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발음했고 그 순간 댐이 무너지듯 울었다. 친구는 당황하면서도 나를 이해한다는 듯 솔직함을 독려해왔다. 나는 알겠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다시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선잠에 빠지며: 절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있는 기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터트리고 보니 나는 그저 불안 없이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을 뿐이었다. 별게 다 거창하다.



+ bonobo - heaven for the sinner (feat. erykah ba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