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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며칠에 걸쳐 쓴 일기를 며칠 후 읽다 보면 종국에는 멀미가 난다,


2월마다 2월이 싫었다그런지 오래 되었다꼬리가 잘린 것 같은 달력 모양도 어색했고 4년마다 하루가 더 생기는 것도 이상했다어릴 때는 겨울방학과 봄방학 사이 그 어중간한 몇 주를 이해할 수 없었고 머리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많은 2월에 싸우거나헤어지거나버려지거나했다. 2월마다 좋은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쁜 일이 많았다매해 더욱 새롭게 2월을 싫어했다일 년 중 제일 짧은 달에 나는 제일 길게 괴로웠다.


이번에도 어림없었다불안이 농축된 2월이었다그건 원서 결과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작년 2월과는 또 다른 불안이었는데얽혀있는 사정이 많기도 했거니와 어떻게 정확히 형언할 수도 없는 질감이어서 나는 종종 입을 다물며 외로워했다대학원 마지막 로테이션을 끝낸 2월 마지막 날오피스 책상을 정리하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이제 이런 불안은 끝이라고 생각 아닌 다짐을 했다그도 그럴 것이 2월 내내지난 여덟 달의 무소속감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기라도 하듯 눈앞의 뻔한 하루하루를 눈 뜨고도 알 수 없었다모르면 재미있지 않냐고 모르는 게 더 재미있지 않냐고네가 그렇게 묻기도 했지만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조금이라도 확실히 아는 것들이 있어주면 한다고 대답했다어느 하나에라도 견고하게 발을 딛고 있어야 여기저기의 부표를 밟아볼 수 있는 거잖아별다른 대답이 없었다침묵 앞에서 나는 서글퍼졌다이런 방식이라면 너를 이해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나의 제일 거대하고 보잘것 없는 불안은 우리 중 나 혼자만 이런 불안을 앓아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기 때문에,


이 불안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물론이다하지만 이성적인 불안이란 게 있기라도 한단 말인지그건 마치 이성적인 믿음faith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믿음이 이성적이 되는 순간 더는 믿음이 아닌 공식이 되는 것처럼 불안 또한 이성적이 되는 순간 더는 불안이 아닌 걱정이 되고 만다불안은 논리 이전의 것이고나는 불안이 너무 많아 자주 논리를 잃어버린다논리를 잃는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애써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상이다나의 안개를 평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 불안은 고작 걱정 따위가 되어버리고사람들은 혼란해한다나는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가관이다.






도망치듯 북쪽으로 날아갔다집 수도관이 얼어터져 갈 곳을 잃은 친구와 낯익은 방에서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이불을 나눠 덮고 열두 시간을 잤다작년에 나눠먹었던 월아이와 칼라마리 튀김을 또 나눠먹었다사람이 없는 술집에서 오스카 시상식을 보며 바에 앉아 술집 문이 닫을 때까지 흑맥주를 마셨다처음으로 눈밭에서 차를 몰아봤고처음으로 차를 샀다길과 복도에서 자꾸만 사람들을 만났다나의 위치를 매번 해명했다동기들과 요란하게 떠들며 싸구려 중국 음식을 먹었다안 가본 술집에 갔다남의 고민을 들었고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마음 따뜻한 말들과 마음 아픈 말들을 들었다미끄러진 김에 눈밭에 한참 앉아 영화 <밀레니엄 맘보>의 눈 오는 장면을 생각했다가로등 불빛에 온통 노란 새벽이었다.


추웠다정말 툭하면 눈이 왔다덕분에 뻔한 날씨 농담을 하며 깔깔 웃었다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때마다 내가 막연하게 느꼈던 격차 같은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 설령 단기적이라 하더라도꽃눈 터지기 직전의 모양새로 아픈 2월처럼.


다 못 마신 커피를 들고 비탈길에 주차해 둔 차에 올랐다시동을 걸고 엔진을 데우며 기다렸다. 남쪽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지도를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만지다가 날짜를 보았다. 3월이 된지 한참이었다.



+ kaskade - samba love (redux extended 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