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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돛단배

그렇게 우리의 사방이 호흡으로 찬란했다,



점에서 나와 들어간 식당에서 남자친구는 삼계탕에 소주를 시켜놓고 나와 마주보고 앉았다가 문득, 너 뇌과학 공부하잖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하더니 '기억'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나조차도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단어와 개념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풀어 설명했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작용이 같은 자극 앞에서 예전보다 강해지는 걸 우리는 학습이라고 칭해, 치매는 기억하지 못하는 질병이고 PTSD는 망각하지 못하는 질병이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추위에 떨며 주위를 배회하다가 골목 여럿을 통과해 영화 <북촌방향>에 나온 소설에 갔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고, 담배를 피우던 주인분은 남자친구에게 불이 나간 천장을 좀 봐달라 부탁하셨다. 깨진 전구 조각이 떨어지는 밑에 서서 전구를 갈아끼우는 남자친구를 보며 주인분은, 원래 성격이 차분한가봐요? 했다. 헤어지기 전 나도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차분해? 나는 이렇게나 성급하고, 덜렁대고, 뭘 잘 잃어버리고 길도 잘 못 찾고 툭하면 걷다가 어디 부딪히고, 쉽게 동요하고, 눈물도 겁도 많은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일정해?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같은 목소리로 차분한 척 하는 거야, 그러나 하는 척이 이토록 연속적이면 진짜로 하는 것임을 안다 선술집을 나와서 지하철역 안으로 쏟아지듯 왁자지껄 들어가는 친구들을 한 친구와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다가 그 부분들이 기억이 났다. 그날 거기서 그랬었거든, 그런데 그게 자꾸 생각나... 별로 취하지도 않았는데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야기를 하다 말고 친구의 팔짱을 꼈다. 친구는 팔짱을 더욱 단단히 끼고는 (       )이라고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과연 그랬나(보다). 마지막으로 함께 걸을 때 문득 눈이 왔고,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지던 예전을 떠올려내며 기가 막히네... 말끝을 흐리던 남자친구는 사실 내가 제설차 부른 거야 이거, 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그때 올려다본 장난기 어린 얼굴 뒤로 흩날리던 눈가루는 쎄한 가로등 불빛 때문에 아주 부드러운 유리 조각처럼 보였다. 어쩌면 깨진 가로등 전구 조각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없었고, 좋았다. 그래서 나 또한 의외로 차분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기분은 딱히 학습한 것은 아니므로, 나는 그것을 굳이 기억하지도 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거듭되는 우려와는 달리 우리 체온의 번복은 질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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